완성되지 않은 존재에 대하여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민음사, p.19)
사람은 어쩌면 완성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존재인지 모른다.
어떤 날은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어떤 날은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또 어떤 날은 뒤를 돌아보며 망설인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잘 살고 있는 중'이라는 증거가 된다. 넘어지지 않고는 배울 수 없고 주저하지 않고는 진짜 자신을 마주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스러운 이유가 된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넘어지면서도 계속 걸어가려 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아름답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고 흔들리고 불완전한 채로 살아가는 게 본질이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위안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완벽하려 하고 언제쯤 괜찮아질까를 계산하고 남들처럼 잘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마음이 품고 있는 바람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잘 해내고 싶다."
"흔들리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도 뒤처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다."
그 바람이 얼마나 순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그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래서 힘든 것이다. 갈망이 있는 존재라서.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지금보다 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그 마음이 없었다면 이토록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픔마저도, 사람이 사랑스러운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필요한 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나아가려는 마음이다. 오늘도 다리를 건너는 중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잠시 멈추어 숨 쉬는 것도 건너가는 과정의 일부이니까. 그러니 오늘은 조금만 더 자신에게 다정해도 괜찮다.
원래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당신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중이니까.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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