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이 생기면 부딪힌다. 둥글기만 할 때는 아무 데도 걸리지 않지만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요즘 나는 자주 부딪힌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들이 날카로운 모서리처럼 느껴진다. 나를 감싸던 보이지 않는 완충지대가 얇아진 것 같다.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모든 것이 직접 닿는다.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결정력이 자라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더 가벼워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됐다. 맞지 않아도, 불편해도 "어쩔 수 없지"라는 말 뒤에 나를 숨길 수 있었다. 그 말은 면죄부였고 동시에 작은 피난처였다.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설명해야 할 근거도 필요 없었다. 그저 상황이 나를 데려간 곳에 서 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건 내가 고른 방향이고 이건 내가 남겨둔 관계라는 걸 안다. 그래서 선택은 분명하게도 내 몫이고, 그만큼 책임도 또렷해졌다. 흐릿한 경계선 너머로 숨을 곳이 사라졌다. 내 발이 닿은 자리마다 흔적이 남고,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내 이름으로 기록된다.
요즘의 울퉁불퉁함은 모나서가 아니라 각이 생겼다는 증거에 가깝다.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모든 것에 맞춰졌지만 이제는 맞춰지지 않는 부분들이 생겼다. 그게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건 내가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나를 중심에 세워도 사람의 연은 늘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붙들린 지점에서 자꾸 작은 트러블이 생긴다. 관계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몸 어딘가에 묶여 있어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 실이 팽팽해지거나 느슨해지거나 때로는 엉킨다.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는 순간에도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중력 안에 있다.
차라리 철저하게 혼자가 되면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계를 끊고, 거리를 두고, 고립되면 덜 다치지 않을까. 상처받을 일도, 실망할 일도, 화낼 일도 없지 않을까. 그렇게 깨끗하게 정리하면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질까. 고립이라는 단어가 주는 차가운 안정감이 어떤 날엔 유혹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또 회피를 하려나 싶어서 얼른 정신을 차려본다.
고립을 떠올릴수록 평온보다는 공백이 먼저 떠오른다. 문제가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은 고요하다기보다는 텅 빈 느낌에 가깝다. 살아 있다는 감각까지 함께 옅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부딪히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어쩌면 문제는 사람을 붙들고 있어서가 아니라 붙들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연결되고 싶지만 다치고 싶지 않고, 가까워지고 싶지만 불편하고 싶지 않고, 사랑하고 싶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모순된 바람들이 겹쳐지면서 관계는 자꾸 삐걱거렸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시기의 질문은 '고립해야 하나'가 아니라 '어디까지 연결될 수 있나'에 가깝다. '모든 연을 끊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관계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나를 지키면서도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거리는 어디쯤일까. 다치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간격은 얼마나 될까.
선택이 늘어날수록 삶이 반드시 유쾌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불편함은 퇴보가 아니라 기준이 생겼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은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매끄럽지 않고, 때로는 혼란스럽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
아무렇게나 이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조금 거칠고, 매끄럽지 않아도 그건 삶을 대충 살지 않겠다는 하나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편하게 흘러가는 대로 두지 않고, 내 방식으로 살아보려는 시도다. 그 시도가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외롭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길을 택했다.
각이 생긴다는 건,
그렇게 나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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