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다닌 골목이었다. 벽돌 담은 여전히 기울어 있었고 작은 카페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골목이 전혀 다른 곳처럼 다가왔다. 평소보다 낮게 깔린 빛과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이로 골목은 마치 나를 모르는 척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편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하는 작은 당혹감. 그 불편함과 함께 그냥 서 있었다. 익숙함의 얇은 막이 걷히면 풍경은 늘 그렇게 생경한 얼굴을 드러낸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널 좀 알지",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며 쉽게 단언하다가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처음엔 부정하게 된다. 내가 만든 틀 안에 상대를 다시 집어넣으려 애쓰게 된다. 그 불편함을 빨리 없애고 싶어서. "너 좀 낯설다"며 웃어넘길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완벽히 안다고 믿었던 세계에 금이 갈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오래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배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냉정히 들여다보면 그 고통의 정체는 상대의 배신이 아니라 내가 쌓아 올린 관념의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가깝다. 함께한 시간, 쌓아온 의미, 내가 붙잡고 있던 확실함들이 흔들리는 그 틈새에서 우리는 한참을 헤맨다. 그 불편함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상대를 탓하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불편함은 세계의 변심이 아니다. 이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은유작가는 글쓰기를 관성적인 생각들을 문장으로 옮기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자기 소외'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익숙한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 그 불편한 거리 두기가 오히려 진짜 나를 만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만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규정한 상대의 모습이 깨지는 그 불편한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진짜 그 사람을 마주할 기회가 열린다.
무언가를 완벽히 '안다'라고 믿는 그 찰나, 역설적으로 우리의 성장은 멈춘다. 확신은 견고한 틀이 되어 우리를 그 안에 가두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서둘러 없애려 할수록 우리는 그 틀 안에 더 깊이 갇힌다. 낯섦이 주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우리는 비로소 관성에서 깨어난다. 숨겨진 나를 드러내고 가려진 세계의 실체를 새롭게 보여주는 힘은 바로 이 생경한 충격에서 나온다.
불편함은 멀리 있지 않다. 오래 알던 얼굴이 문득 달라 보이는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그 문턱에 서 있다.
[뜬금 없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2] 연재를 마칩니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