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나를 찾기 위한 두 번째 여행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뒤, 가장 힘들었던 건 아이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족이지만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다. '평범하지 않다'는 현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엄마,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
우리 꼬물이는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이따금씩 이렇게 말해준다.
“그래 맞아. 꼬물이는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지?”
애써 웃으며 대답할 때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마음 깊숙이 믿지 못할 신을 끊임없이 원망했다. 정말 신이 있긴 한 걸까? 반항심이 끝없이 솟구치고, '이대로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인가'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넘쳐흐르던 시기였다. 나는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게 주어진 인생이겠지!”, “어디 한번 해봐! 어디까지 나를 괴롭힐 수 있는지!”
끝도 없이 화만 났다.
한동안은 누구를 탓할 힘도, 그렇게 할 의지도 없었다. 내 삶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고 숨고만 싶었다. 그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지켜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꼬물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무너지지 말아야 해" 수없이 나 자신을 다독였다.
'지킬 게 있는 나는 행복하다.'
'지킬 게 있어서 감사하다.'
마치 기도하듯, 끊임없이 되뇌었다.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빨리 찾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철학관을 자주 찾았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같은 질문을 쏟아내고 같은 답을 듣고도 계속해서 그곳을 찾았다.
"왜 자꾸 운명을 묻고 다니냐"
어느 날 철학관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운명을 자꾸 묻지 말고, 주어진 걸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충고였다. 사실, 나는 그저 털어놓고 싶었다. 마음 편히 내 치부를 드러낼 곳이 없었기에 그곳에서라도 묻고 싶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한 이유는 나에게 위로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털어놓을수록 내 마음속 우울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 꼬물이, 다시 내게 올 수 있을까요?"
항상 한 가지 질문만큼은 빠뜨리지 않았다.
꼬물이 손을 놓고 나서야 모든 것이 끝났기에, 그 죄책감이 늘 나를 짓눌렀다.
'네 마음껏 조각해 보라'
운명의 속삭임으로 주어진 인생에서 나만 이기적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철학관만이 아니었다. 혜민스님과 법륜스님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받곤 했다. 특히 혜민스님의 강연 때는, 준비도 없이 눈물과 콧물이 쏟아져 감당하기 어려웠다. 법정 스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길상사에도 다녀왔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 하늘로 휘날리는 색색의 연등들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을 다독였다.
나는 치유받고 싶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누구라도 "괜찮다, 괜찮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모든 것을 업보라 생각하면 참 서럽기만 했다. 하지만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니, 양가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로 다가왔다.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하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지만, 곧 실망감과 우울감이 다시 찾아왔다. 수없이 두 가지 감정 사이를 넘나들었다.
살면서 이런 양가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향은 결국 양가감정에서 더 무게가 실린 쪽으로 흐르게 된다. 매번 알아차리면서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 다행히도 내 무의식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다시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혼자가 된 이 시간, 글을 쓰며 나를 더 깊이 알아가고,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다.
'네 마음껏 조각해 봐라'
다시 한 번 운명이 속삭인다. 나는 주어진 이 기회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조각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내 경험과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훗날 좋은 글로 남기를,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여행이 행복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