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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13.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13-2 : 휘림의 시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야에 청횟빛 그림자가 아른아른하였다. 온 몸이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겁고 사방에서 두들겨맞은 양 욱식욱신 아파왔다. 정신이 선명해져온들 그 곳이 어데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시야로 한없이 푸름이 흘러들었다. 나는 아마 물에라도 빠졌던 모양이다. 자신의 사지를 실감하고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락사락 이마에 어떤 감촉이 살며시 스쳐지나갔다. 이것은 무엇일까. 까슬하이 부드러운 한짓결 단면의 감촉, 흐릿하고 선연하기를 반복하는 시선의 상.

아해의 온 감각에 닿는 것은 얇디 얇은 백짓장이었다. 어드메에도 향할 필요가 없는 역마의 종착은 그렇게 탕 비어있었다. 그저 펄럭이는 종이가 맞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해어지고 있었다. 그 공간감 사이로 기분 좋은 실바람이 넘실거렸다. 여기는 잔잔한 유속이 멎을 듯 멎지 않는 드넓은 강의 하류...

갈 곳은 커녕 가야 할 까닭도 없어진 아해는 이번에는 가자미가 된 양 바닥에 납작하게 쩍 달라붙듯 스러져 내리눕는다.

그저 품에서 실낱이 갈라지듯이 번지는 익숙한 묵내만이 한낱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지금 이 곳에 존재한다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찾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충동의 반증이 아닌가-?

종착에서 괜스러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찌하야? 대관절 어떤 심상의 흐름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뺨에 팔뚝을 붙이고는 눈물을 흘려 옷자락을 적셔보았다. 할 수 있는 한 두꺼운 방울을 뚝뚝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눈물이 모자라면 할 수 있는 한 가장 슬픈 생각을 했다. 사실 살면서 그렇게 슬픈 일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살아가며 놓친 것을 후회했고 앞으로 맞닥트리게 될 이별이 두려웠다. 그래도 충분히 젖지 못하거든 침도 칵칵대며 뱉어대었다.


카악 - 커억, 컥 -


그토록 꺽꺽대노라니 목 안쪽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며 칼로 그이듯 갈라지는 느낌이 서렸다. 혀의 밑녘부터 목젖을 지나 횡격막까지 이어지는 근육이 한 줄 한 줄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음을 감각한다. 키윽이라는 글자가 갖는 음소를 그토록 생생히 지각해본 일이 나로서는 전례없다. 목녘이 너덜너덜하여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을 때 즈음에서야 비로소 팔뚝을 감싼 옷자락이 추욱 젖다못해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늘어졌다.

품에서 묵을 꺼내어 손아귀에 움켜쥐고 옷자락에 박박 그었다. 현현한 묵색이 팔뚝 위에서 습자지가 물을 먹듯이 거칠고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새카맣게 절은 옷자락에 덮인 팔뚝을 지면에 털었다. 먹물이 하이얀 바닥 위에 자갈처럼 흐드러졌다.

머뭇거리면서도 팔뚝을 크게 탁탁 털어가며 자갈이 흐드러지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축축한 것은 꼭 자갈의 모양을 했다. 자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자 분명하게 발이 아파왔다. 그것은 실로 자갈이었다.

처음에는 턱, 턱, 지면에 크게 멍울지던 먹물 자국이, 옷소매를 털어대면 털어댈수록 점점 자잘해져갔다.

문득 웅얼대며 노랫말도 읊조려보았다.


바윗-돌 깨트려 돌-멩이.


돌-멩이 깨트려 자갈-돌..


자갈-돌 깨트려 모래알-...


묵빛이 자잘해져가며 칠흑같던 검음을 잃는 동시에 제 형태를 가져갔다. 바닥에 내가 남긴 자국들은 길의 형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려나가매 나는 꼭 내가 조물주라도 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아니하다, 묵이 스스로 제 실존을 찾아간다...

더 이상 팔을  탕탕대며 털어보아도 떨어질 물기가 없었다. 더 적셔보기에는 온 몸이 바싹 말라서 흘릴 땀방울 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마른 송연 부스러기만이 부슬거렸다.

어느새 해가 지기라도 한 것 마냥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바스락바스락 저녘 바람에 침엽수 이파리 스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저 하이얗던 세계가 어느샌가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풀잎향도 송진향도 산들산들 솔바람에 실려 코 끝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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