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입대하기 전까지 둔촌주공 아파트에 살았다. 거의 10년 이상을 한 아파트에 살면서 대학도 가고 군대도 갔다. 나한테는 추억이 정말 많은 곳이기 때문에 철거하기 전에 와이프를 데리고 살던 동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실제로 재개발 후 입주까지는 거의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둔촌주공 아파트를 많이 소유하고 계셨었는데, 노선생님들은 80 가까운 나이에 새 아파트에 입주를 앞두고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청약을 해야할까 말까 고민을 좀 했다. 결국은 청약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올림피크 파레온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재개발 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둔촌주공일 뿐이다. 졸업하고, 결혼하고 둔촌주공을 떠나왔는데, 다시 둔촌주공에 들어가는 것을 과거로의 회귀처럼 느껴졌다. 경제활동을 결정짓는 근거는 이성에 근거한 철저한 논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정에 빠져 결정을 내렸고, 그런 결정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여튼 청약을 하지 않았다.
둔촌주공 아파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진짜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 결과 남들이 가고 싶어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치열함이 다시 둔촌주공 아파트에 가고 싶지 않은 대표적인 원인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심적 고통, 불안 등이 다시 생각날 것 같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잠을 줄이고, 앞 동에 사는 친구 방에 불이 꺼져야 나도 그날 공부를 마치고, 시험이 끝나는 당일만 놀았던 생활이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들조차 ("나"상가 앞에서 미니카를 굴리고, "다"상가에 있는 미용실을 다니고, "라"상가에서 치과를 다니고, 중학교 친구들과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농구하다가 관리실 아저씨한테 혼나면서 쫓겨나고, 남들은 다 동북고등학교 가는데 나만 보성고등학교에 배정되어 엄청 울기도 했었고) 공부했던 기억에 가려지는 것 같다.
둔촌역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었던 아파트에 살았다보니 대학 다닐 때는 집에서 둔촌역까지 15분 정도 걸어서 등하교를 했었다. 그때는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 때문에 그 거리가 짧게 느껴졌었던 것 같은데, 지금 같아서는 못할 것 같다. 마천행과 상일동행으로 갈리는 5호선도 불만의 원인이었다. 밤에 한번 열차를 놓치면 15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이런 추억임에도 불구하고 청약을 고민했던 이유는 학군 때문이다. 아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초등학교를 두개나 품은 아파트, 동북중학교, 보성중학교, 동북고등학교, 보성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학군은 최고라고 생각한다. 물론 학군이 최고라고 해서 거기 다니는 학생들이 다 서울대학교를 가는건 아니지만서도 그 분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되어서 보니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느끼게 되었다.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지만 감히 짐작해보면 상업지로서 매력을 갖추지 못한 둔촌주공 아파트는 훌륭한 학군 때문에 집값의 하방이 굳건할 것 같다. 이때문에 나중에 전세로라도 한번 갈 수도 있을 듯?
둔촌주공 아파트에서 나는 진짜 열심히 살았고, 엄마 아빠도 나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다. 그 때문에 좋은 대학고 갔고, 로스쿨도 갔고, 자격증을 땄고, 경찰도 됐다. 다른 곳에서 살았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는데,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공부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았던 장소는 둔촌주공 아파트였다. 내 역사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 입주를 시작하고 나면 한번 방문해서 올림피크 파레온은 어떤 느낌인지 꼭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