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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Mar 08. 2022

하루 3시간이면 말이야

마지막 페이지가  얼마 안 남은 '월든'을 읽고 있는데 옆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야, 너네 애들 다니는 학교에서 방역 알바 두 명 구한대. 나 거기 이력서 넣으려고. 너도 같이 하자. 응?"

친구는 얼마 전부터 취업, 돈 얘기를 자주 꺼냈다. 나한테도 매일 책만 읽고 집에 있지 말고 나가서 일하라고 재촉을 했다.

한 달 전쯤이었나. 설 명절이 지나고 주말, 오랜만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싶어 자주 들르는 카페를 갔었다. 원래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는 아니어도 지척에 살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차를 마신다.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 정도는 아니고 단순한 안부를 전하며 우정을 쌓는 관계라고 할까? 아무튼 너무 깊은 곳까지 침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그런 친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는 그날 전화로 나에게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애들 가르치는 일을 하라며 애들 다 컸고 손도 많이 안 가고 시간도 많은데 왜 안 하냐고 잔소리 같은 조언을 날렸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에둘러 대화를 끝내면서 살짝 선을 넘은 것 같은 말에 기분이 조금 상했었다. 그 뒤로 친구는 또 한 번 연락을 해왔다. 반도체 회사 자재부에 취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많은 자기를 뽑아줘서 얼마나 고만 운지 모르겠다며 너도 회사를 알아보라는 선 넘는 말을 장전하고 쏴버렸다.


집안 살림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밖에서 일을 하는 게 자긴 더 좋다던 친구는 아이들 개학을 핑계로 출근을 미루고 있다가 아예 잘려버렸다. 나한테 자랑 아닌 자랑과 아슬아슬 선을 넘으며 나를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더니 쌤통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닌 척 위로를 했다.

'어머, 속상하겠다. 또 좋은 일자리 생길 거야.'라고.


그래도 친구는 취업에 대한 열망이 아직 식지 않아서 이번엔 학교 방역 알바를 하겠다고 했다. 아는 언니가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일하는 시간도 짧고 시간당 12,000원 받는 꿀알바라고 했다.  

지원서 제출 때문에 출력을 부탁받고 프린트를 하면서 봤더니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시간당 10,990원에 산재보험도 적용된다고 쓰여있었다. 지원서랑 각종 안내 서류를 출력해 달라고 나한테 카톡을 했던 것이다. 두 명 뽑는데 나보고 또 같이 하자고 한다. 하아... 얘가 어디까지 나한테 들이대려고 이러는 걸까?

'친구야, 거긴 내 딸이 다니는 학교야. 애 입장에서 엄마가 자기 학교에 방역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거 싫어해.'라고 딱 잘라 말했더니

'야 뭐가 싫어. 애들은 다 관심 없어. 열체크하고 방문자 출입 관리만 하면 되지 애들이 무슨 상관이야.'

그래. 친구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애들은 관심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구 입장에서 생각이고 나와 내 딸이 생각하는 구역까지 깊게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니 그 말에 내가 따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지난번 독서지도사 일에 이어 또 선을 넘고 있는 것 같아 이번엔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네 생각이지. 너 마음대로 생각해서 말하지 말아 줄래.'


자주 연락하는 것도 아니라 모처럼 집중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오는 걸 안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꼭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지기보다 선 넘는 말로 기분을 망치게 하는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은 누구 탓을 해야 되는 걸까. 친구에게 하루 3시간 아르바이트는 살림을 잠시 내려놓고, 미취학 자녀가 돌아오기 전에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동안 돈이라는 물질을 취득하며 얻는 귀한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 하루 3시간은  블로그 글 한 편을 쓸 수 있는 시간이고, 마음만 먹으면 300페이지 책을 다 읽을 수도 있다. 번뇌를 다스릴 수 있고, 온갖 물욕을 잠재우기도 하며, 복잡하고 피곤한 인간관계를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시간로 나 역시 살림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나만 생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각자 생각하는 황금 시간이 다를 뿐 돈 버는 시간이 아니라고 해서 가치 없는 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점을 친구라면 알아주길 바라는데 이 정도 바람은 무리인 건지 안타깝다.


 더 이상 말이 안 먹히는 것 같으니 책을 빌려가겠다고 한다. 재밌고 시간 보낼만한 책이 없겠냐며 내 책장을 둘러보더니 이지성의 <하루 관리>, 조신영의 <경청>을 집어 들고는 재밌는 책이냐고 물었다. "어, 재밌지. 근데 소설 아니고, 시간 때우려고 읽는 책도 아니야. 자기 계발서야. 습관에 관한 거랑, 마음을 얻는 힘을 배우는 책이야. " 내 말을 듣더니 책을 내려놓으며 그런 책은 따분하다고 한다. 뭐 재밌는 거 없냐고 계속 책을 살피길래 한 방 날려 주었다.

"친구야. 책은 목적을 두고 읽는 게 좋아. 물론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읽고 그냥 덮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뭔가 남는 게 있어야 되지 않아? 네가 책 읽으려는 목적이 뭔지 먼저 생각하고 그 뒤에 너한테 맞는 책을 고르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책 두 권을 추천해주었다.

김미경의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다.

취업도 좋고 돈 버는 일도 좋은데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아닌 남이 해보니 좋다는 일을 쫒는 친구가 조금 딱해 보였다. 왜 자기 주체는 없는지 말이다. 자기 삶에서 놓치고 있는 뭔가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에 추천 하긴 했는데 부디 다 읽고 내면이 강한 엄마로, 친구로, 여성으로 살아가길 친구로서 바라는 바다.

그리고 다시는 취업 얘긴 나한테 하지 않는 일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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