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도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넷플릭스에서 시즌2로 돌아온 '더 글로리'의 인기가 뜨겁다.
어른인 내가 봐도 자극적인 장면과 난무하는 욕설이 불편했지만 인물이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만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창 시절 끔찍한 폭력을 당한 문동은, 남편의 폭력 앞에서 딸을 지키며 사는 강현남,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 때문에 지옥에 사는 주여정,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을 무시한 채 떳떳하게 살고 있는 가해자들 옆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던 경란. 그들은 모두 '내 편'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던 극 중에서 피해자들의 모습은 동은을 빼고 자신을 감추며 살고 있었다. 또 다른 피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서,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곁에 없어서, 도와줄 사람을 찾기 어려워서다.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이라는 엄마도 딸의 자퇴를 돈과 바꾸기까지 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딸이 마약을 하고 사람을 죽였는데도 외면하고 묻어버리는데 그 돈을 썼다. 그들만의 내편은 그렇게 쓰였다.
작년에 내 딸이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때 가해 친구들은 내 딸 보다도 먼저 교내 위클래스에 찾아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들에게 외면당한 일로 힘든 마음을 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얘기를 들은 친구가 당사자 아이들에게 가서 '너네 욕을 하더라'로 옮겨진 게 화근이었다.
처음엔 아이가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에 몰려 당장 학폭으로 신고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다. 그러기 전에 아이가 실수한 건 없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자신의 실수를 먼저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라 내 딸의 실수가 발견되더라도 침착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도 처음엔 친구들이 왜 갑자기 자기를 멀리하고 바로 옆에서 손가락질하면서 수군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러 아이들 앞에서 모멸감이 들게 만드는 행동을 견디지 못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보면 그 아이들이 어김없이 와서 내 딸과 얘기 나누던 아이를 '잠깐 와봐. 할 말 있어.' 하면서 데려갔다고 했다. 그러면 그 뒤로 그 아이는 내 딸과 거리를 두게 되는 식이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내 딸이 자기들의 험담을 하고 다닌다고 퍼뜨리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내 딸이 따돌림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한참 이성에 관심이 높을 때이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남녀 공학인데 학교에서 인기가 좀 있거나 자기들끼리 관심 있어하는 남학생들 얘기를 자주 나눈 모양이었다. 그러다 유독 남학생 얘기를 많이 하고 관심이 많은 아이가 있었고 딸은 친하다고 느꼈고 말이 옮겨질 거란 생각도 없이 그런 얘길 서로 나눴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옮겨졌다. 이 부분에서 일이 커진 것이다.
딸이 생각 없이 한 얘기는 분명 잘못된 부분이다. 쉽게 말해 친구들 사이에선 내 딸이 험담을 한 것이다. 실제 친구들이 남학생들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인게 사실이더라도 딸은 그런 얘길 다른 사람과 함부로 대화 거리로 삼지 말았어야 했다. 딸이 잘못한 점은 인정하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담임 선생님도 그 부분에 있어서 관련 아이들을 불러 상담을 진행했고 딸이 사과를 전했다고 했다. 중간에서 말을 옮긴 친구도 딸에게 사과를 했다. 그 친구 역시나 제삼자 입장에서 남의 얘길 함부로 말한 것은 잘못이다.
단순하게 여자 아이들 간의 감정싸움으로 끝날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일은 크게 번졌다.
선생님의 개입으로 사과를 전했지만 관련 아이들은 내 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자신들이 입은 상처가 더 크게 생각되어 교내 위클래스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내 딸을 철저하게 혼자를 만들었다. 곁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고 한 번은 탈의실로 딸을 불러내서 아홉 명에게 둘러싸인 채 '사과를 주고받았지만 이전처럼 너랑 가깝게 지내는 건 힘들 것 같아. 우리가 너를 받아주려면 시간이 필요해. 앞으로 우린 너를 같은 아이중 한 명으로만 생각할 거야.'라고 통보했다. 갑자기 혼자가 된 딸은 아이들과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쉬는 시간이면 교실에 있기 힘들어 옆 교실을 기웃거리거나 복도를 혼자 걸었고 점심도 거르는 날이 많았다.
학원도 학교도 가기 싫었고 잠도 잘 못 잤으며 먹을 거 좋아하던 애가 양이 줄어서 얼굴이 핼쑥해졌다.
딸은 따돌림을 받은 원이니 모두 자기 탓이라고만 생각해서 먼저 마음을 열면 친구들이 용서하고 다가와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건 딸의 온전한 잘못이고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지 않았고 여러 명에게 퍼뜨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 바로 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련된 아이들의 입장은 자신들이 여러 학생들 앞에서 딸에게 행동한 일들이 모욕감을 주어 따돌리는 행위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 조별로 활동해야 될 때도 딸은 늘 혼자였다. 한 반에 30명인데 그중 여학생 수는 16명이고 그중 10명이 한 무리다. 나머지 6명은 서로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5명 마저도 한 무리. 그러니까 16명의 여학생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내 딸은 10명에 속해 있던 아이였고 외톨이가 됐으니 9대 1대 5가 된 셈이다. 동아리 활동을 할 때도 딸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엎드려 자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정규 수업과 관련 없는 동아리 활동이라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자유롭게 놔두어서 교실을 이탈하지만 않으면 공부를 하든 자든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책임지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학교에는 없었다.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에 와선 무기력하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학원 갈 시간이 돼서 억지로 일어났다. '아 가기 싫다'소리가 랩처럼 나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공부에 집중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뿐. 이런 말이 도움이 될 리가 있나. 더구나 공부라니.
담임 선생님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딸이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단단해지길 바란다고 말이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그 아이들과는 어차피 관계가 끝난 것 같으니 더 이상 피해의식도 갖지 말고 기죽지 말고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말이다. 딸이 그동안 보인 행동에서 자기가 잘 못 했던 말에 대한 책임과 사과는 분명히 진정성 있었고 충분히 반성했고 따돌림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도 아니라고 말이다.
나는 내 딸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다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서로간의 이해와 배려,공감이 빠진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오해가 있을 땐 추측으로 나쁜 감정을 키울 게 아니라 당사자와 대화를 통해 이해를 하고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자기 감정만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내 딸의 얘길 다시 하자면 친구들이 남학생들에게 과한 관심을 갖는게 보기 않좋은 점을 다른 친구에게 말할 것이 아니라 '얘들아 우리 남자 얘기만 하지 말고 다른 재밌는 일을 해보자'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또 딸의 얘길 듣고 관련 아이들에게 달려가 말을 옮긴 친구도 'OO아 그 애들이 이 얘길 들으면 기분 안 좋을 거 같아. 다른 얘기 하자.'고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말도 옮기지 않았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생각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픈된 공간에 이런 사실을 밝히며 글을 쓰는 이유는 나는 딸이 움츠려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딸이 미성숙한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졌다고 생각한다. 그 책임이 당연한 결과였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딸은 다른 누군가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으로 모욕감을 주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단체 행동을 통해 위협을 주지도 않았다는점이 관련 학생들과 다르다는걸 엄마로서 말하고 싶은 부분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주 객관적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딸의 따돌림 사건을 겪으면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일정 부분 가해의 범주에 들어간 부분도 있었다.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일이지만 이 일을 통해서 사회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배웠다고 생각하자도 다독였다. 반성 없는 관련 아이들을 보면서 학폭 신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꼬리표 처럼 따라 다닐 일을 생각하지 그게 더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아이한테 더 피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입장이었다.행정 처리를 줄여주어 고마워서 인지 담임 선생님도 학폭 담당 선생님도 고맙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고마움을 받기도, 거절하기도 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를 보면서 피해자는 평생을 상처로 얼룩져 살아가는 모습에 참담했다. 드라마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지독한 복수가 통쾌하다고 해야 할지 잘했다고 해야 할지 그 점은 또 다른 범죄일텐데 정단한 행위라고 해야 할지 마음이 요란했다.
누군가에겐 이미 지난 일을 갖고 어쩌라고 할 지 몰라도 그 지난 일이 평생을 괴롭히는 일이 되는 사람의 삶은 누가 책임져줄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