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쯤, 남편과 데이트 같은 외출을 했다. 남편의 옷을 사러 아울렛을 가던 중 딸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이날은 딸도 친구와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쇼핑 가는 날이었다.
"엄마, 이것 봐. 내가 한 거야."
딸이 보여준 것은 계란 볶음밥이다. "오, 제법인데? 가스 불 켜는 거 안 무서웠어? 기름은 적당히 부었고? 프라이팬 뜨거우니까 손 안 다치게 조심해. 장하다. 이런 것도 혼자 할 줄 알고.
온라인 학습 중 실과 시간에 '가스 불 없이 요리하기'실습이 있었다. 나랑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크래미 유부초밥을 만들기로 했다.
수업이 시작된 날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가 직접 요리해본 사람 있어요?"
순간 딸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상 수업 마이크를 잠시 음소거하더니,
"엄마, 요리 안 해본 사람 나밖에 없어."
요리 안 시킨 것도 이제 내 탓이냐. 딸의 투덜거림이 곱지 않게 들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해주었다.
"엄마가 너 아끼느라 그러지. 안 해봤으면 어때. 엄마가 일을 했다면 아마 지금쯤부터 하나씩 가르쳤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엄마가 다 해주고 싶어. 엄마 마음 알지?"
금방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입을 삐죽거리고 수업에 다시 집중하는 딸을 지켜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편이 점심을 먹자고 불러냈다. '그래, 얘는 자기가 만든 유부초밥 먹으라고 하고 나는 나간다.'
유부초밥 실습이 있던 날 이후부터 부엌에서 요리할 때마다 말없이 지켜보는 일이 많아졌다.
친구들은 계란 프라이는 물론이고 볶음밥도 해먹을 줄 아는데 자기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왜 안 가르쳐 주냐고 투덜거리더니 쉽게 요리를 허용하지 않을 엄마를 잘 아는 딸은 조용히 지켜보기 작전을 세웠을 것이다.
이날 만든 딸의 볶음밥은 간단했다. 계란을 터뜨려서 스크램블 한 것을 따로 덜어 두고, 밥을 볶다가 덜어 두었던 스크램블을 합쳐서 케첩을 넣고 끝! 아, 소금도 약간 넣었댔지. 동생과 먹을 밥의 양 조절은 내가 볼 땐 실패한 것 같았는데 둘째는 언니가 처음 만든 요리에 꽤나 만족스러웠나 보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때 언니한테 볶음밥 해달라고 할 테니 편히 자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옛 어른들 말씀이 딸은 살림 밑천(요즘 이런 말 쓰지도 않지만 썼다간 아동 학대로 잡혀갈지도)이라더니, 아이들은 자기 속도대로 잘 커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겁 많고 소심한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첫 째는 의외로 용감하고, 도전의식이 강한 아이였다. 내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그동안 벼루던 자신의 요리 세계를 펼쳐 보이는 용기와 도전이 빛났던 하루였다.
사실 오늘 아침도 운동 다녀온 뒤 잠깐 눈을 붙였는데 둘째가 나를 깨우려는 걸 첫째가 "야, 엄마 깨우지 마. 더 주무시게." 그런다. 볶음밥 이후 자신감이 붙어서 스크램블을 뚝딱 해갖곤 케첩을 얹어 둘이 아침을 먹었다. '에라 모르겠다. 니들이 자유를 줬으니 호사 좀 부리노라.' 하고 십여분을 더 누워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침을 안 차려준 게 내심 미안해서 냉면을 삶아주는데 첫 째가 또 말없이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다. "엄마, 나 학교 가는 주간에는 일찍 안 일어나도 돼. 내가 알아서 먹고 갈게." "왜, 반찬 없어도 엄마가 차려 주는 거 먹고 가는 게 더 좋지 않아?" "그건 그렇지. 근데 뭔가 엄마가 매일 피곤한데 깨우기 좀 그래서." 나를 걱정해주는 딸의 마음은 고마운데 왜 미안할까?
나도 딸의 나이일 때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엄마가 가게를 운영하셨고, 언니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부쩍 바빠졌다. 아직 초등학생 신분이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내가 식사를 책임지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처음 밥을 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기밥솥도 아닌 압력밥솥에 쌀을 안치는데, 쌀을 버린 건지 흘린 건지 구분 안되게 싱크대를 어지럽혔지 아마.
밥도 많이 태우고, 3단 밥도 해보고, 그러면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때도 내 속마음은 내 딸과 같은 생각이었을까? 엄마도 내가 고맙고 미안했을까?
딸은 틈만 나면 스크램블을 해서 아침을 해 먹는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딸이 만든 스크램블과 내가 운동하고 오는 길에 사 온 맥모닝을 곁들여 아침을 얻어먹었다.
예전에 엄마랑 사이가 무척 안 좋았을 때 화가 나서 '너랑 똑같은 딸 낳아서 어디 잘 키워봐'라고 했던 말은 진짜였다.
딸은 나랑 똑같이 엄마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어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내 딸에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잘한다고, 많이 웃어주고 칭찬해 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