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예요. 첫째를 돌보기 위해 퇴사를 결정하고 한 1년쯤은 직장에서 근로복지공단에 휴직급여를 신청해주어 매달 70만 원을 꼬박꼬박 받으며 살았어요. 그래 봐야 아이 분유, 기저귀 사는데 쓰고 기본 생활비도 없어서 언니한테 꾸고, 신용카드 대출받아가며 살았어요. 남편이 아등바등 일해서 버는 돈은 고정적이지 못했거든요. 늘 빚지며 사는 생활이 지긋지긋했어요. 둘째가 태어나고는 조금씩 일이 풀리기 시작했는데 남편은 늘 혼자 경제를 책임지는 것에 불안해했어요. 내 건강상 이유로 둘째도 100일 지나서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기 시작했는데 돌이 지나고 안정된 이후 저에게 취업을 권유하더라고요. 그 당시는 아직 30대 중반이었고 사무직 일자리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이 둘을 낳고 육아에 치여 살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힘들게 사는 사람 형상이었어요. 웃음기 없고 찌푸린 미간. 최대한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시에서 창출하는 일자리 센터 모집공고를 통해 갔는데 면접장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미혼이고 기혼은 나 하나였어요. 1대 1 면접이었고 드디어 내 차례입니다.
"아이가 어리네요?"
다짜고짜 첫 질문이었습니다. 느낌적으로 알아요. '죄송합니다. 당신은 면접에서 탈락되었습니다.'
알지만 차분하게 대답했어요.
"네."
이어서 답정너 질문이 이어졌어요.
"출근하시면 아이는 누가 돌봐요?"
"지금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습니다. 남편도 도와줄 거고 일하는데 문제가 된다면 지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굳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어요. 면접관이 물어보는 질문 자체에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고 아이들을 볼모로 나를 팔고 있는 순간이 부끄러웠어요. 나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구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밝지 않은 표정을 하고 나오는 내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자기야, 다 젊고 어린애들이 왔어."
오래된 일이지만 이날의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나답게 사는 게 뭔지 잘 모르고 방황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유리 멘털을 가진 내 지난날의 기억들을 리셋시키고 싶어서입니다.
오랜 방황과 지친 육아로 무너진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김미경 강사의 강연장을 혼자 갔었어요. TV와 유튜브를 보며 마치 내게 위로를 전하는 말 같아서 빨래를 개면서 보다 울고, 설거지하면서 물소리에 잘 안 들릴까 볼륨을 최대로 높여 들었어요. 그래. 나라고 못할게 뭐가 있나. 아직 때가 안되었을 뿐이야. 이런 생각을 품고 강연장을 간 거였어요. 가까이 볼 수 없었지만 강사님의 목소리와 제스처는 오로지 나만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한 시간 반 강연이 끝나고 즉석에서 <김미경의 인생 미답>이라는 책을 구입 가능하여 얼른 줄을 서서 결제를 하고 옆에 앉았어요. 사인을 받기 위해서요. 내가 아는 한 강사님은 따뜻했어요.
“요즘 힘들지? 애는 몇 살이야. 괜찮아. 다 잘될 거야. 힘내.” 하시며 눈 맞춰주시고 토닥여주시더라고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용기를 내었던 시작은 이때부터였어요.
이 일을 계기로 내가 행복하고 아이들과,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감도 느끼기 위해 가장 좋은 건 뭘까 고민했는데 결국은 ‘나답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함을 알게 되었어요.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과정을 찾는 일. 그게 ‘나답게 사는 일’이더라고요.
그 과정에 책이 있었고 때로는 채찍을 내리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는 은유 작가처럼 그동안 삶이 막혔던 거구나. 말이 엉키니 전달되지 못해 답답했었던 삶을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삶을 뚫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책과 글쓰기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세상 밖에서 떠돌지 않고 싶어 선택한 가장 나답게 사는 일인 것 같아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나답게 살고 있나요?
#나도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