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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Aug 22. 2020

나의 꽃

  

7월에 둘째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러 천안 아산에 영인산 자연휴양림을 간 적이 있다. 산 정상을 오르는 길이 전부 아스팔트로 되어 있고 오르막이지만 아이랑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기 좋은 곳이었다. 걷다가 중간중간 돌바위에 새겨진 시가 있었는데 그 중 나태주의 <풀꽃>을 보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아이는 물었다. 왜 자세히 봐야 예쁘냐고. 그냥 봐도 예쁘지 않냐고. 내 자식이지만 순수한 질문에 웃음도 나고 엄마의 눈으로도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본적은 신생아 이후 언제였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자세히 봐야만 예쁜 당신을 알게 되는 것인지.

예전엔 카카오스토리에 아이들과의 일상을 올려두었고 지금은 블로그나 인스타에 귀여운것들만 추려서 올리고 있다. 며칠전 카카오스토리에서 지난 추억을 공유해주어 발견한 둘째의 영상이 마치 이제야 자세히 보고 예쁜것을 알게 된 엄마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평소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그림을 그려놓고 내게 설명을 하는 영상이었다.

 

“엄마, 이 나무는 지금 기분이 좋은거야. 그래서 웃고 있는데 나무색깔 때문에 잘 안보여.”

“뭐 때매 기분이 좋은거야?”

“아 뭐냐면 열매가 가득 열려서 좋은거야.”

“그렇구나, 그래서 웃고 있는 거 맞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찍어놓은 영상을 보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냥 봐도 너무 예쁘고 귀여운아이여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그림을 아이는 설명한다. 머리가 아주 긴 여자 그림이었는데 바로 미래의 자기 모습이란다. 라푼젤처럼 긴 머리를 갖는게 소원인 아이였다. 그리고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머리는 자르지 않을거야.”

그런 아이를 영인산 휴양림을 다녀오고 더위가 기승을 부릴즈음 혼자 머리감게 하기 때문에 길고 숱 많은 머리를 감당할수 없어보였다. 짧게 자르면 머리감는 시간도 줄고 훨씬 귀여워 보일꺼라고 엄청 꼬셨다. 한달 반만에 내 꼬심에 넘어가서 7살에 가졌던 꿈을 깨면서까지 도전했는데 짧게 자른 머리스타일이 어색해 친구들이 혹시나 놀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아이다. 머리를 묶지 않고 다닐때면 우리가 장군이라고 놀렸던 내 행동이, 둘째의 깊은 마음을 자세히 보지 못한 엄마가 7살의 꿈을 엎어버렸다. 머리야 다시 기르면 되는 일이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데 문득 둘의 데이트에서 그냥 봐도 이쁘게 보면 되지 않냐는 순수함 결정체인 아이에게 그동안 무덤덤하게 대해준것이 내심 미안해진다.

 “너는 늘 예쁘단다.


셋째아이를 잃고 한참 가슴앓이를 할 때 종교의 힘을 빌어 마음의 빚을 용서해보고자 성당을 찾아간적이 있다. 난생처음 용기내어 첫 교리수업을 듣고 세번째 수업이 있던날 교리반 선생님께서 돌아가며 가장 사랑받고 있을때가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누군가 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돌봐준적이 있었는가 떠올리는데 바보같이 사랑받지 못하고 큰 것 같은 생각이 앞섰다. 순서는 바로 코앞인데 심장이 두근거려졌다. 뭐라고 답을 할 까 망설이다가 순수한 영혼의 내 딸들이 매일 하는 말을 꺼냈다.

 

“엄마, 사랑해요.”

나는 엄마에게 한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고 나도 그런 말을 부모님에게 해본적이 없는데 내 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엄마인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야단치고 화낸후에도 사랑하니까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아이들.

나는 챙김받지 못한 아이였다고 늘 위축되어 있던 내면아이를 내 아이들이 안아주고 있다고 답을 했다. 사실 그 대답을 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인데 그 말을 하며 주책맞게 울어버린 나는 아이를 통해 나를 자세히 들여다본 일이 된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일이기에 아이의 순수한 말처럼 그냥 봐도 예쁠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미워했던 사람에게도 발견하지 못한 장점이 있다.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번씩 막힐때마다 상대에 대한 화도 나지만 내 실수와 부족했던 것을 찾으며 자책했었다. 가족과 사회계관계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자세히 보면 예쁘다는 존재라는 걸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 열등이었음을 인정하기까지 늘 무너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나란 사람은 아이들에게 늘 사랑받는 엄마로, 건강한 어른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어른으로 단단하게 살고 있다. 마음이 쉬어가고 싶을때 내 얘기를 들어주는 지인, 지식의 한계를 공부하게 하고 호기심을 자극시켜주고 열심히 사는 우리 미작인들을 만난것이 이제는 나도 풀꽃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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