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호텔 마니아가 선택한 생애 첫 3성급 호텔
나의 시부모님이 타이페이로 상경할 때만 해도 로컬들의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던 다통취(大同區)는 그 후 정부 계획하에 주요 상권이 타이페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서히 옮겨가면서 이전의 뜨거운 활기를 잃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만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통시장 '디화제(迪化街)'를 중심으로 매년 춘절(春節) 즈음에는 각 지역에서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등 진귀한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보통의 날에도 한약재 및 각종 건조식품을 찾는 로컬들로 적당히 부산스러운 분위기다.
디화제(迪化街)를 중심으로 한 다다오청(大稻埕) 지역 건물들은 법적으로 개보수가 철저하게 제한되어 100년 된 건물쯤은 꽤나 흔하고, (대만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들여다보면 참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그 시절 특유의 동서양이 혼재된 건축양식 덕택에 다다오청 특유의 시간이 멈춘듯한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가한 어느 토요일 오후, (대만에서 99.9%의 정확함을 자랑하는) 구글맵을 켜고 오늘 예약한 호텔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몇 번을 지나친 끝에 이게 호텔인지, 여관(Inn)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소박한 입구를 찾았다.
목적지도 모르고 짐만 챙겨 따라온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 타이페이 좋은 호텔은 꽤나 다녀본 까다로운 와이프가 손수 고른 첫 ‘3성급 호텔’이라니. 명색이 호텔인데 주차도 제공이 안되어 5분 거리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야 하는 웃픈 상황. 하지만 나는 (평소와 다르게) 모든 것이 여유롭다. ‘기다려봐, 웬만한 로컬은 모르는 그런 재미난 곳이 여기에 있어’.
Lobby, Originn Space
내부로 들어서니 오렌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의자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구수한 커피 향이 커피바(Bar) 너머로 흘러나온다. 내가 걸어 들어오자 바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가 작업하던 노트북을 챙겨 바로 자리를 비켜주는 것으로 보아 오너인 걸로 추정된다.
복잡한 절차 없이 이름만 확인하고 열쇠를 받아 들면 체크인은 완료. 주차하고 있는 남편이 올 때까지 앉아있으라며 스태프가 커피를 주문받았다. (이곳에 투숙하는 동안 모든 커피는 공짜이다!) 자리를 비켜주었던 아저씨는 (역시나) 이곳 오너 중 한 명이었는데, 몹시도 대화에 적극적인 분이었다. 내가 한국 OO책에서 Originn Space를 읽고 찾아왔다고 하니 꽤나 신기해하는 눈치다. 건물 오너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여러 명의 공동투자자가 이 건물을 장기 렌트했다고 한다. 다통취(大同區) 특성상 처음에는 호스텔을 기획했으나, 막상 객실 단장을 마치자 호스텔로 하기엔 퀄리티가 너무 아까워(!) 부띠크 호텔 형식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이제 받아 든 키를 들고 방으로 올라갈 시간. 100년 된 건물에 위치한 Originn Space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없다. 밑에서 까마득한 돌계단을 올려다보니 두 살배기 아기는 안 데려온 게 신의 한 수.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2층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2층은 두 개의 방이 있는데, 화장실/욕실을 공용으로 사용해 호스텔의 느낌이 섞여있다. (물론 나는 개별 화장실이 딸린 3층 방으로 예약을…)
Room, Originn Space
돌계단을 한번 더 올라 드디어 3층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나만의 공간이 펼쳐진다.
Originn Space의 ‘한방’은 TV 대신 자리한 60년대 LP 플레이어다. 돌계단 코너에서 마음에 드는 LP판을 골라 올라오면 방 안에서 프라이빗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아델(Adele), 노라존스(Norah Jones)와 같이 익숙한 가수들의 노래도 LP판으로 듣는 선율은 묘하게 낯선 매력이 있다. 마치 그 시절 올드 타이페이로 돌아간 듯, 넷플릭스(Netflix) 대신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즐기는 밤. 여느 특급호텔에서는 누릴 수 없는 또 다른 럭셔리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사실 여기 방값이 한화 18만 원 정도인데 7만 원만 더 얹어도 101 빌딩 옆 그랜드 하얏트 타이페이(Grand Hyatt Taipei)의 최상급 베딩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는 수영장도, 헬스장도, 타이페이에서 가장 맛있는 조식 뷔페도 있다…) 그렇다면 Originn Space의 어떤 매력이 이 호텔 마니아의 눈에 들어 하얏트의 안락함을 포기하게 만든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곳의 매력은 어쩌면 기성세대보다 우리 MZ세대에게 더 어필한다. 잘 보지도, 가져보지도 못한 근사한 LP 플레이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지어진 100년 된 건물, 생경한 나무 창살의 창문으로 들리는 거리의 소음, 캐리어 들고 불평 없이 돌계단을 영차영차 올라가며 “재밌다!”라고 웃을 수 있는 체력까지. 기성세대에게는 (어릴 적 경험으로) 익숙해서 별것 아니게 느껴지거나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는 요소들이 우리에겐 하나의 유니크한 경험으로 어우러지는 곳.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손님 대부분이 20-30대라고 한다. Make sense!
다음날 아침. 조식은 제공되지 않지만 맛있는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 도보 10분 거리에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대만편 오프닝을 열었던 먹자골목으로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작은 호텔들이 B&B(Bed and Breakfast) 형식으로 어설픈 조식을 제공하는 것보다, 본인들이 잘하는 ‘커피 한잔’을 제대로 내놓는 편이 개인적으로 훨씬 만족스럽다.
대만살이가 만 6년을 넘어서면서 호텔 탐방에 흥미를 잃어가던 찰나 만난 Originn Space는, 대만에서 처음 만난 ‘로컬과 상생하는 호텔’이었다. 체크인할 때 나눠주는 초창기 일본인 게스트가 그렸다는 다다오청 일대의 그림지도를 따라 주변을 걷다 보면, 100여 년 된 건물을 개조해 특색 있게 꾸민 멋진 공간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모습을 나타낸다. 호텔명 뒤에 (일반적인) ‘타이페이(台北)’가 아닌 ‘다다오청(大稻埕)’이라는 동네 이름이 붙은 것도 꽤나 흥미로운데, 결국 Originn Space에 묵었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다다오청의 매력인 셈이다.
한 때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핫한 동네였지만 현재는 전통시장 디화제(迪化街)로 근근하게 명색을 잇고 있는 다통취(大同區) 다다오청(大稻埕). 평일에는 총 네 개의 방 중 하나만 나가도 썩 괜찮은 거라며 멋쩍게 말하던 스태프의 모습에 (굳이) 오너 아저씨 걱정이 좀 되긴 했지만… 하늘길 빗장이 완전히 풀린 요즘, 곧 이 귀한 경험을 알아보는 멋쟁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시작되기를 바라본다.
해외살이의 빛바랜 모토 ‘일상을 여행처럼’이 실현되는 1박 2일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Around, Originn Space
다다오청(大稻埕)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두 곳을 소개한다!
# Mikkeller Bar Taipei
주소: No. 241, Nanjing W Rd, Datong District, Taipei City, Taiwan
세계 각국의 로컬 양조장과 협업하여 수제맥주를 생산하는 ‘집시브루잉(Gypsy Brewing)’으로 유명한 브랜드, ‘미켈러(Mikkeller)’의 타이페이 지점이 다다오청에 있다. 역시 오래된 건물을 멋지게 탈바꿈시켜 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타이페이점에서만 볼 수 있는 포토제닉한 맥주잔이 포인트다. 미켈러의 베스트셀러는 물론, 대만의 로컬 재료를 사용한 특색 있는 수제맥주도 많으니 꼭 들려볼 것!
A Design & Life Project
주소: 2F, No. 279, Nanjing W Rd, Datong District, Taipei City, Taiwan
두 명의 젊은이가 운영하는 재미있는 라이프 스타일 소품샵. 300여 개가 넘는 소품들이 1층에서 2층까지 빼곡하게 차있다. 그중 반 이상이 이 브랜드의 오리지널 디자인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라 유니크한 여행 기념품을 찾는 여행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상점이다.
글, 사진 ©dream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