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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늘 May 14. 2024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정의 달, 5월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일이라고 했다. 평균수명의 연장 역시도 고통의 연장으로 봤다. 그런데 정작 쇼펜하우어는 폐렴으로 죽음이 왔을 때 죽기 싫어한다.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이유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고통스러운 인생이어도 더 살고 싶어지는 것일까?







 나는 죽고 싶었다기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라서 고통스러웠다. 결혼해서 살면서 십 년이 넘어갈수록 한 번쯤 이혼이야기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 고비를 넘기고 이 십 년을 향해가다 보면 시간이 약이 될 때도 있다문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이다.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시고,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셔서 나는 그런 환경에 익숙한 편이다. 그런데 나는 가부장제 시집 문화 때문에 맏며느리 사표를 냈다. 내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오로지 자식 때문에 참고 사셨다고 하지만, 두 분의 맞지 않는 부분 때문에 환갑이 지나서도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늙어서 보자라고 하는 것도 옛말이 되었는지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자신을 위한 소비도 하지 않으시며 아버지를 잘 돌보며 사신다. 아버지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는 나에게도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나도 남편과 자식을 위하며 그렇게 살았다. 맏며느리 역할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집문화가 나를 병들게 할 줄은 몰랐다. 요즘은 자식 키우는 것도 힘들어서 저출산이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애들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집 문화는 시부모님을 모셔야 비로소 맏며느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한 독립을 이해받으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집의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도 가부장적이시기 때문에 나는 가부장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제사도 정성껏 모셨다. 하지만 분명 달라져야 할 부분은 있다. 나는 이미 대학에서 남성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20대가 좋긴 하지만 여성이기에 더욱 불안한 심리도 있었다. 보호받고 싶기도 했고, 가정을 꾸려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평범한 미래를 막연하게 꿈꾸었다. 나 혼자만의 미래설계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이다. 처음에는 현실 부정인지 20대의 나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렇다면 인생의 우선순위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찾으며 할 일을 하는데 쏟고 싶었다. 남편은 결혼 후 나의 내조로 직장일만 하면 되었지만, 나는 사회적인 경력도 단절되고, 많은 역할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시댁이나 집안의 많은 일들은 부불노동에 불과했다. 물론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의 근로노동과 월급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우리는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대출에 대해서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로지 절약과 저축으로 기존 종잣돈을 불려 갔다. 종잣돈이 있었기에 전세로 살던 신혼집을 매수할 수 있었다. 사고 나서 집값은 올랐고, 그 덕분에 분양받은 아파트로 갈 때 잔금을 치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어찌 보면 돈을 번 것은 남편이지만 불린 것은 나였다. 아파트 분양도 내가 받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경제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뒤늦은 경제공부를 통해서 저금리시대의 많은 기회들을 놓친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성급하게 투자를 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상 대박을 꿈꾸지 않기에 뒤늦게 빚을 내지 않았고 아직 대출 경험이 없다. 하지만 운빨의 지속력으로 나의 집 역시 사고 나서 몇천만 원이 올라있는 상태다. 용기와 확신을 위한 경제 공부를 꾸준하게 해 나갈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시댁은 늘 일손이 필요했고, 시부모님은 가족끼리 돕는 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일방적으로 한쪽만 계속 도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겠는가?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집의 일군이 되어야 했고,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만 참으며 시집의 문화를 따르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의 생각, 가치관, 배려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의 의견도 존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시아버지의 의견만을 따라야 할 뿐이었다. 애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고, 결국 나는 탈진해 버렸다. 




 가정의 달이다 보니까 원가족이 모였다. 각자의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기에 형제들의 관계도 예전 같지는 않다. 각자 살기 바쁜 것이다. 부모형제가 잘되는 것은 물론 좋지만 이제는 배우자와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더욱 좋은 상황이기도 하다. 가진 지위와 능력에 비하면 너무나 겸손하고 순하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 보니까 우리 형제들도 그 순한 기운을 물려받았다. 활발하게 바깥 활동을 하는 편이 아니고, 빚 없이 10억이 넘는 집에 살면서도 헬스장 가는 돈을 쓰지 않을 정도로 알뜰하다. 집에서 살을 빼고, 산책을 하며 내실을 다지고 가족을 위해 산다. 부모형제가 함께 살던 세월만큼이나 이제 각자의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오는 양가감정도 있다. 물론 가장 든든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늦은 나이에 독립을 했다고 하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런 심리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다들 월 현금흐름을 원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에 속아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투자를 하고 사기를 당한다. 월 배당금을 받는 포트는 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적 네트워크로 벌어다 주는 수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벌어다 주는 수익이 있다면 세상에 부자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수익이 있다면 왜 남들에게 권하겠는가? 자신들의 부모형제, 친지들이 하기에도 자리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즉 호구들이 필요해서 투자자들을 모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박을 꿈꾸지 않기에 오늘을 살아가며 나를 돌본다. 당장 돈 한 푼이 없다면 곤란하겠지만 집이 있고, 저축이 있으니 아끼고 모으며 알뜰하게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노후준비는 건강 관리가 우선이겠고 자녀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인 나에게 잘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신을 잘 돌보며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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