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의 희진]
여자한테 버림받은 과거가 있는 나의 이야기에 앞서 희진,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나는 어쩜 희진을 만나기 위해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올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희진이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모든 것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고 글이 되는 마법을 부렸다.
1990년 희진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의 맑은 하늘에서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희진은 손바닥 우산을 하고는 횡단보도에 서서 비를 맞았다. 그때였다. 검정 우산이 희진의 머리 위로 다가오던 순간, 남자의 수줍은 미소를 보았다.
"우산 같이 써요."
희진의 머릿속 생각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의 맞은편에는 동네 빵집인 '고려 베이커리'가 보인다. 이 남자가 말한다.
"빵 먹고 나면 비가 그칠 것 같은데 빵 먹고 갈래요?"
이 낯선 남자와 집까지 같이 가도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머뭇거리던 희진에게 빵을 먹자는 제안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희진은 그러겠다고 "네" 머리를 끄덕거렸다. '고려 베이커리'에는 커다란 맘모스 빵이 인기 빵이다. 이 남자가 그 커다란 맘모스 빵을 집는다.
"저도 이 빵 좋아해요"
겉은 소보루빵이고 안에는 딸기잼이 샌드 된 맘모스 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이 남자가 자르고 있다. 앉아서 보니 교복 상의의 명찰이 보인다.
'김순철이구나'
학교 배지도 보인다. 희진이가 사는 동네에서 잘 나가는 고등학교이다.
이 남자, 김순철이 말을 꺼낸다.
"사촌동생이랑 같은 학교네요."
희진의 교복을 보고 알아보는 모양이다. 먹기 좋게 자른 맘모스 빵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서 희진에게 건넨다. 우리는 말없이 맘모스 빵을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우비였나 봐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맑은 하늘이다. 희진은 여우비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마음에 드는 낱말이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부담이죠?"
"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네?"
"또 만나고 싶어요."
이 남자, 김순철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서는 이름과 전화번호, 학교와 반 그리고 번호까지 적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희진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김순철이라는 남자에게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1990년에 희진을 만난 김순철에게 나는 강한 질투가 일어났다. 나와 같은 '철'자의 이름을 가진 김순철도 나도 희진을 너무나도 알아가고 싶어 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겨울날의 햇살 같았다. 한순간의 여우볕이라고 해도 그녀의 곁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싶었다. 희진, 그녀에게 빠져드는 내가 두렵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