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구와의 흔한 약속.
친구와의 약속을 다지면서 친구와 매일 놀고 같이 먹고 친구 집에 가서 자는 등 다양하게 우정을 깊이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본다.
흔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그 약속.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리라고 상상은 하지 못한다.
초등학생 때 사귀었던 친구를 중학생 때 보리라 생각하고 중학생 때 사귀었던 친구를 고등학생 때 당연히 볼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던가 평생 갈 줄 알았던 사람과의 우정은 깨어지고 금세 새로운 우정을 만들고자 하지만 만들기 어려워진다.
피상적인 관계, 이해타산적인 관계, 내 마음을 시원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관계…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며 과거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과거에 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분노가 오른다.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말이다.
예전 친구들 같았으면 내가 말을 안 해도 알아주고 척하면 척 친구랑 눈빛만 바라봐도 알 수 있었다.
친구와 나. 우리. 이렇게 서로서로 눈빛 교환으로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군가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
제발 나 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 괜한 고집을 피워본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거나, 돌려서 말하는 등 제발 눈치채 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말이 있다.
너 너무 차가워
너 그렇게 하면 사람들 다 떠나갈걸?
네가 원하는 거 뭔지 모르겠어… 미안해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것인데 왜 저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단지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러는 건데…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사람과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히고자 하여도 좁히지 않는 그 간격.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성문의 빗장을 걸어잠구듯 내 마음의 문의 빗장을 걸어잠구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더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이전과 다르다며 나를 떠나가곤 했다. 단지 나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내 마음과 무색하게 사람들은 나를 피하게 되고 서서히 나도 사람들을 피해 간다. 이제는 피하는 것이 익숙하다. 속에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다. 새로운 관계를 맺더라도 깊이 알아가는 관계가 아닌 서로 대면대면하는 사이 나에 대해 깊게 관여 안 하는 사이인 피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고민하던 찰나 어느 한 유튜브 영상이 내 눈에 띄었다.
나에게 솔직하면 왜 자유로워지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때 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행동으로 변화하게 되고 나타난 모든 것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드러난 것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를 존중하게 되고 타인도 존중하게 되니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내용이다.
이 영상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인 줄 알았는데 나부터 돌아보라는 말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부터 돌아보라는 말인가? 이 영상 찍은 사람이 스님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스님도, 목사도 아닌 일반인의 영상이었다. 도대체 왜 나부터 돌아봐야 하는지 의문인 채 잠에 들어들었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이어가던 나날 어느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계속하다가 소통으로 변화할 무렵 그 사람이 나에게 말을 하기를
"나에게 없는 걸 다른 사람에게 계속 요구하네요"
나는 의문이 들어서 물어봤다.
"네? 어떤 말씀이신지?"
"컵 안에 찻 잎만 있는데 차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차가 우려 지지 않습니다. 그러고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하죠 '왜 나만 차를 못 마시는 거야! 다른 사람은 차는 마실 수 있는데!'라고 말이에요. 나에게 없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릇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없는데 어찌하여 다른 사람에게 요구를 하는 건가요? 즉,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요구한다한들 소리 없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전에 봤던 유튜브 영상이 생각나며 물어봤다.
"그러면 나의 삶을 돌아봐야 하는 게 나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봐야 하나요?"
그 사람은 고개를 살포시 가로지으며 말을 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천천히 돌아보셔야 합니다. 내가 살아온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말이죠. 이걸 족적을 따라간다, 더듬는다, 밟는다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삶의 족적을 따라갈 때 나의 긍정적인 부분, 부정적인 부분인 나의 모든 면이 드러날 겁니다. 이때 보기 싫어서 족적을 더듬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을 머리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면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부분은 극대화시키고 부족한 부분은 보완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저는 마음으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행동으로 옮길 때 또 한 번 난간에 부딪히죠. 나의 부족한 부분이 또 한 번 드러납니다. 어떤 모양이든 간에 말이죠. 그럴 때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피하는 사람은 저는 머리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그것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사람은 저는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시 한번 이전과 같이 부정적인 부분은 보완할 때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벽을 느낄 겁니다. 그 벽을 그대로 바라보고 이것 또한 나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저는 이 사람은 나를 수용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수용하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의 자아를 존중하게 됩니다. 그 결과 타인의 자아 또한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 이러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며 신뢰롭고 편안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종이 울리 듯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일어나서 나의 삶을 떠나기 위한 여행길을 걷기 위해 집으로 나섰다.
책상 위에 앉아 나의 삶을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나의 20대 시절 나는 어떻게 생활을 해왔는지, 내가 어떤 생각, 감정으로 삶을 살아왔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10대, 유년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바라보는 것이 어려웠다. 고통스러웠다. 나를 마주 보는 작업이 말이다. 나의 인간관계상이 어떻게 나오는지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작업이기에 말이다. 그래도 나를 위해서라면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를 돌아봤다. 마음속에서 때론 포기하는 것이 편하고 다른 사람도 편할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것이 좋다고 얘기를 계속했으니 말이다. 그 마음에 굴복을 하듯 10대 시절의 나의 족적을 밟아 나갈 때 한번 펜을 내려놓으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머리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삶을 돌아보는데 힘썼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훤히 드러나보였다.
특히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이다. 나의 욕구,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부분. 그것이 나의 부족한 면이었다. 과거 욕구는 자제하는 것이 좋으며 감정표현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는커녕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를 형태로 변질이 되어갔다는 것을 자각했다.
마음으로 나를 이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 감정을 표현해 보기로 노력해 본다. 행동으로 옮겨본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얘기할 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 이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떻게 할까? 걱정도 많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행동으로 옮겨본다. 두려움과 걱정은 눈 녹듯 사그라진다. 내 마음에 조그마한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내 마음속에 안개가 말을 걸었다.
너 이런 모습 아니잖아? 이래 봤자.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이 말을 계속 무시하고 나의 감정, 욕구를 표현했지만 계속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내 나는 수긍을 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조그마한 불씨는 꺼져가려고 한다. 안개가 그 불씨를 꺼버리려고 할 때 작은 빛이 속삭였다.
너 머리로 인정하고 있구나?
내가 머리로 인정하려고 하고 있다니. 열심히 변화하기 위해 감정과 나의 욕구를 표현했으니 마음으로 인정한 것 아닌가? 마음으로 이해하고 인정한 거 아닌가? 머리로 인정한다라는 그 말과 함께 나를 한번 다시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한번 돌아보니 내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면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생각, 정서가 나를 또 한 번 사로잡았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기 싫은 부족한 면이 한번 더 드러났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기 싫어서 나의 감정과 욕구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던 찰나 머리로 인정한다는 것이 스쳐 지나갔었다. 내가 그러한 행동을 보였을 때 거절하는 모습이 보였을까? 아니, 나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할 때 많은 사람이 거절하는 모습이 없었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에 맞게 행동을 해줬다. 그렇게 안심을 하고 나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했다.
시간이 지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는 것에도 한계를 느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솔직하다고 싫어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솔직해서 좋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쓰러지지 마. 다 왔어. 한번 너를 바라보면 돼
과거, 한계에 부딪혔을 때 나를 바라보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번 눈을 감고 나를 돌아봤다. 나의 모습. 과거부터 나의 현재를 말이다.
감정과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현재의 나이고 때로는 거절당해서 힘든 모습도 나의 모습이다. 지치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나의 모습이다. 그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걸어온 나의 모든 것. 그것이 나라는 것을 이제야 자각하게 된다. 깨달아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를 받아들이게 되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나를 휘감는다. 나를 바라볼 때의 자유로움, 편안함, 평안함, 여유로움 등 다양한 감정, 단어 등 표현으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그것들. 그 순간 나는 나와 타인으로부터 과거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