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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맹샘 Oct 26. 2021

초등교사인 나는 요즘 쇼핑하러 학교 간다.

국가공무원으로서의 예산집행에 관해

"물건이 품절되어 자동 환불처리되었습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면 정말 난감할 뻔했다.


아이들의 성화에 들어간 사이트에는 물건이 품절되어 자동 환불처리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늦어도 모레쯤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품절이라니 난감했다. 공정무역 초콜릿 주문이었다. 아이들이 공정무역을 공부하면서 공정무역 초콜릿 포장지를 디자인하기로 해서 190개의 공정무역 초콜릿을 주문했다. 다음 주 수업 계획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초콜릿 언제 오냐고 성화이길래 "주문했지요"을 쾌활하게 외치며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웬걸. 품절이란다. 아이들이 자기들 덕분에 알지 않았냐면서 짐짓 흐뭇해한다. 사실 원래 사려고 했던 공정무역 초콜릿이 품절이라 겨우 대체품을 찾아서 주문한 것인데 또 품절이다. 행정실에 다른 제품으로 주문했냐고 물었으나 행정실도 환불 처리된 사실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큰 학교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기나긴 탐험에 가깝다. 1000명이 넘는 학교라 6학년 학생들만 해도 190명에 이른다. 선생님들이 밤새 찾고 연구한 자료들을 구매하려고 했을 때 너무 양이 많아 없다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에 물건 사기는 간단하지 않다. 몇 번의 퇴짜를 맞은 경험이 있어 항상 판매처에 미리 전화를 해보지만 이번엔 전화를 미리 해보지 않은 게 실수였다. 사실 초콜릿 190개면 많은 양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공정무역 초콜릿 수입이 원활하지 않은가 보다. 부랴부랴 다른 업체에 전화를 해서 물건 확보를 확인하고 다시 행정실에 메신저를 보내 물품구입을 부탁했다.


학교에서 물건을 사려면 아래의 과정을 거친다.

1. 교육과정과 관련 있는 물품을 회의를 통해 선정한다.

2. 물품과 목적에 알맞은 예산을 찾아 품의서를 작성한다.

3. 물품의 단위가 큰 경우 관리자와 미리 이야기하고, 간단한 경우 바로 결재를 올린다.

4. 결재가 끝나면 행정실에 주문을 요청한다.

5. 물품이 오면 검수를 하고, 검수 결과를 행정실에 알린다.

6. 아이들과 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7. 학교 예산이 아닌 경우, 활동한 사진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올린다.

8. 경우에 따라서는 홍보를 위한 보도자료도 작성하여 교육청에 보낸다.


혹시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사의 책임을 묻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예산 쓰는 일은 녹녹지 않다. 특히 19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함께 쓸 물품이기에 정말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교사가 되고 나서 가장 놀랐던 점은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학습지도뿐 아니라 생활지도의 영역까지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학교에는 학생들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공문과 일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절차 또한 관료제의 정석을 보여준다. 신규교사 연수 때 처음 공문 작성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많아야 2-3시간이 공문 작성 연수의 전부이다. 바로 학교에 발령받고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동시에 수많은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교사는 국가공무원이다. 그에 따른 행정업무가 상당히 많다. 특히 많은 교사가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예산 집행이다. 학교에는 수많은 예산이 내려오고, 학생들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두 교사의 기획에 달려있다. 용어조차 낯선 교육운영비, 강사수당, 교육청 예산, 시청 예산, 학교 예산 등등 아주 미묘하게 다른 사용처들과 집행방법들로 골머리를 썩는다. 혁신학교에서는 학년별 특색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년부장의 머릿속은 온통 예산 집행에 관한 것들로 복잡하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해왔던 활동들과는 다른 활동들을 진행해야 하면서 더욱 머리가 아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에게 기획력은 필수다. 처음 교사가 된 후 몇 년간은 수업 관련 책을 미친 듯이 공부했지만, 그 후 학교에서 업무를 맞게 되면서 기획 관련 책들을 미친 듯이 공부했다. 특히 시대의 변화에 대해 쓴 베스트셀러라든지, 일의 절차와 같은 일반 회사의 일 잘러들이 쓴 책들을 많이 봤다. 볼수록 놀라왔던 점은 학교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획력이라는 것이다.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기 위해서 처음, 중간, 끝까지 생각하는 능력, 효과적으로 예산을 활용하고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능력, 다른 사람이 행사를 알기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모두 기획력이었다. 교사가 학교에서 업무를 추진할 때 꼭 필요한 능력이다. 


사실 지금도 미친 듯이 학예회 때 교실을 꾸밀 풍선을 보다가, 통일교육을 진행할 때 효과적으로 활용할 교구를 고르다가, 낮에 요청한 진로검사 견적서를 검토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글을 쓰고 있다. 물건은 미리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5개에서 6개 정도의 일들을 동시에 검토하는 경우가 많다. 맥락을 잃지 않고, 아이들에게 적당한 시기를 분배하여 물건을 구매하여 활용하는 것, 교육과정과 연계한 적정한 시기에 투입하는 것도 모두 교사의 몫이다.


아이들이 직접 활동을 하는 것이므로 무엇하나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혹시 시키게 된 물건의 목재가 유해하거나 마감이 거칠지는 않은지, 개수를 명확히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경로는 없는지, 결제 방법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물건 하나를 시킬 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또 나 같은 경우는 주어진 예산 이외에도 교육청이나 다른 기관에서 요청한 예산들도 함께 쓰고 있어 엑셀 파일이 꽉 찰 정도의 예산 항목들을 관리하고 있다. 관리하고 있는 예산의 종류만 11가지가 넘는다.


정말 요즘은 쇼핑하러 학교에 간다. 


학기초 계획한 대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중간의 아이들의 눈높이나 학습상태에 따라 물품이 변경되기도 하는데, 올해는 그 정도가 심하다. 사실 교사들이 백신을 접종하면 전면 등교가 금방 올 것이라 생각해서 그에 맞는 물품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전면 등교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그에 따라 수업방식이 바뀌면서 물품의 변화가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쌓기 나무도 모둠별로 구매하여 활용하고 있었는데, 모둠활동이 불가하니 개인별로 쌓기 나무를 사야 한다. 또, 전자회로 실험을 모둠별로 구매하여 활용하였는데, 모둠활동이 불가하니 개인별 전자회로 키트가 필요하다. 로봇을 컴퓨터실에서 연결하여 활용하려고 했는데, 특별실 사용이 어려우니 추가 보조 키트가 필요하다. 이런 식이다.


게다가 각종 예산은 모두 잔액 0원을 요구한다. 쇼핑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100만 원을 딱 맞추어서 쓰는 것은 정말 신의 영역이다. 그럼 내 사비를 터는 수밖에 없다. 예산이 애매하게 11,000원이 남았는데, 사고 싶은 물건이 12,000원이라면 예산에서 11,000원을 집행하고, 1,000원은 내 돈을 내서 예산을 털어버린다. 전체 예산이 아닌 각각의 예산 잔액을 0원 맞추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 끊임없는 이 작업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은 참여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 때문이다. 오늘은 세계여행 프로젝트에 맞추어 세계 여러 나라 가옥 만들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몰입해서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찌나 예쁘던지 사진 촬영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힐링이 된달까. 그러니 어찌 쇼핑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선생님들이 우스개 소리로 '내 돈으로 사는 거면 이렇게 열심히 안 보고 막 살 텐데'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다른 물품으로 아이들과 활동하려고 최저가를 찾고, 전화해서 판매자와 네고도 시도한다. 


이번엔 영상회와 유튜브 동아리 홍보를 위해 판촉물 제작도 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도 내가 마케팅 기획자인가 교사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기획과 예산 집행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교육이 되는 과정을 체험하니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오늘 밤새 물건을 알아보고 좋은 물건을 뽑아 내일 또 회의를 할 것이다.


내일도 초등교사인 나는 쇼핑하러 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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