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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준 Sep 11. 2020

꿈해부학『꿈아나랑놀자』제3탄.삶사도론(四道論)

동물처럼 살 것인가, 인간처럼 살 것인가

“아버님은 꼭 아이 같아!”


언젠가 명절을 쇠고 올라오는 길에 집사람이 그랬다. 툭하면 투정 부리는 시아버지가 귀여웠나?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연세가 들어갈수록 자꾸 아이의 감성을 오락가락 하셨다. 금방 화내셨다 금방 좋아지고, 금방 투정부리다 금방 풀리시고. 그렇게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본능과 감성 상태로 돌아가곤 하시더니 온 곳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이 들면 아이가 된다.’고들 하나보다. 연세 들어가는 부모님을 통해 흔히 느끼고 경험하는 일이다. 나 역시 나이가 들면 그렇게 늙어가겠지? 그리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겠다고 늘 다짐하지만, 글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희망을 본 것은 작고하신 박경리 작가님을 통해서다. 돌아가시기 불과 몇 달 전에 TV에 출연하셨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모습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팔순의 어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쩌렁쩌렁한 지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집에서 4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걸어서 40분 남짓. 더운 날은 하교길에 저수지에 들려 수영도 하고, 수박이 나는 계절에는 마을 어귀 원두막에 들려 배가 터지도록 수박을 얻어먹기도 했다. 가을에는 고구마 수확이 끝난 밭에 들려 흙을 툭툭 차노라면 주인 잃은 고구마들이 튀어 나오곤 했다. 갓 캔 생 고구마든, 밭 가에서 갓 구운 고구마든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시골 출신들이 다 그렇듯 시골의 등하교길은 녹색 추억이 가득한 길이다. 하지만, 비오고 눈오는 날이면 할 일 없이 오가야 하는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마을 어른이 계셨다.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늘 불콰한 얼굴로 어기적 어기적 우리의 등하교길을 오갔다. 우리는 학교를 오가고, 그는 술집을 오갔다. 내가 자란 마을은 워낙 작아 마을 안에 가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른은 우리 등하교 길 중간에 있는 작은 주막집을 사시사철 오가셨다. 그러다 일찍 떠나셨다. 


그 어른은 참 본능적으로 살다 가셨다. 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본능적 욕구에 휘둘려 살다 일찍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아낙은 늘 논 밭에서 비지 땀을 흘렸는데, 그는 늘 주막의 술독에 자기 삶을 담가두고 살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한다. 본능적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그 다음은 안전이다. 엄마 아빠의 사랑과 보호에 안전을 느낀다. 엄마 아빠가 멀어지면 불안과 위협을 느끼고 역시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감성이 자라는 단계다. 


그러다 엄마, 아빠가 아닌 사람을 하나 둘 만나게 된다. 그들은 무한 사랑을 주던 엄마, 아빠와는 다르다. 내 욕구보다 자기 욕구를, 내 안전보다 자기 안전를 우선 시 한다. 때로는 빼앗기 위해 싸워야 하고, 때로는 소리 소리 질러 내 아군을 불러야 된다. 하지만 나의 아군 엄마, 아빠가 매분 매초 내 친구들과의 줄다리기에 끼어들어 주지는 않는다. 스스로 타협점을 찾아야 나랑 똑 같이 생긴 작은 아이와 재미 있게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성’, ‘합리성’이라는 단어는 모르지만 암튼 어울리기 위해 혹은 또래 집단에 속하기 위해 적절한 밀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가게 된다. 


성장하면서는 줄곧 이성의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대부분 이성적 기준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길 경우 집단에서 왕따가 되거나 심한 경우 감옥으로 퇴출되기도 한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집에서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즉, 무한 사랑을 주는 엄마, 아빠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우선인 타인들과 적절한 선에서 줄다리기 하며 사는 것이 일상이 된다. 그 기준점은 이성이 판단한다.


‘이성적’이기만 해도 꽤 성숙한 존재다. 자기의 욕망과 이득만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과 안전과 이득도 어느 정도 배려하면서 자기 이득을 취하는 정도가 되어야 이성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부모 곁에서 본능과 감성만 가지고 자라던 아이가 타인과의 접촉과 교류, 공생을 위해 이성을 키워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에서 사는 것 같다. 본능 => 감성 => 이성 단계로 성장하고, 나이들어 간다. 하지만, 그리 살면 늙어가면서 아이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본능, 감성, 이성으로 성장했지만 육체가 쇠약해지면 의지도 쇠약해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보다는 어린 아이가 그런 것처럼 고집이 강해져서 이성 => 감성 => 본능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는 그런 현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현상을 봐도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 역시 부모가 되고, 나의 부모님이 늙어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삶이라는 것은 탄생 =>  본능 => 감성 => 이성으로 성장하다가 되돌아 갈 때가 되면 다시 이성 => 감성 => 본능 => 죽음으로 되돌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의 부모님을 통해서도 유사한 사례를 많이 듣고 보았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뵈면서 ‘아,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적인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죽을 때까지 어린 아이가 된다거나, 치매에 걸린다거나 하는 일이 훨씬 덜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진짜 지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임계점을 통과해야 된다. 임계점을 지나 지성천장(Intellectual Ceiling, 그림 참조)을 뚫고 올라가야 한다. 그 정도가 되어야 몸은 늙고 병들어도 정신은 쩌렁쩌렁한 지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죽는 그날이 와서도 말이다.


반면 임계점에 다다르지 못한 섣부르고 어설픈 지성은 오히려 아집과 고집, 편견을 조장할 뿐이다. 오만의 칼이 되어 다른 사람을 제단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할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어설픈 지성을 재미와 자극으로 포장한다. 이들은 순진하지만 열정적인 사람들을 쉽게 현혹할 수 있으니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어슬픈 지성, 상품화된 지성 두 가지 모두 요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지성적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내 생각을 바탕으로 삶그래프(Life Graph)를 만들어 보았다.

[그림] 삶그래프(Life Graph)



즉, 삶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삶사도론).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동물적 본능과 욕구만 가지고 사는 사람(하류인생), 본능보다는 조금 낫지만 역시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감성적 삶과 인간만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적 삶을 오가는 사람(중류인생), 마지막으로 진정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적 삶을 사는 사람 말이다(상류인생). 


지나친 일반화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율로 추정해 보았다. 대략적으로, 본능적 삶을 사는 하류인생 20%, 감성 + 이성의 보편적 삶을 사는 중류인생 60%, 지성적 삶을 사는 상류인생 20%로.


본능만 가지고 살다 간 사람은 차치하고, 감성과 이성의 단계에만 머물던 사람은 육체가 쇠약해지면 급격하게 이성의 힘이 사라지고 동물적 성질에 가까운 감성과 본능만을 가진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많다. 온 길로 되돌아가는 길이니 그렇게 다시 어릴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배우고, 학습하고, 나누는 이유는 그러한 보편적 자연의 섭리를 초월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만하게 호칭할 수 있는 것은 지성적 삶에 다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아울러, 내 인생의 관점에서도 비록 육체는 나이들어 쇠약해질지라도 생각과 영혼은 박경리 선생님처럼 쩌렁쩌렁한 지성을 가지고 살다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간직한 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내 소중한 자녀와 가족, 친구와 지인들, 제자와 후배들의 인생도 그렇게 아름답기를 바라지 않는가? 


과연 나의 삶은 어떠한가 되돌아 봄직 하다. 나는 과연 본능 중심의 삶인가, 감성 중심의 삶인가, 이성 중심의 삶인가, 지성 중심의 삶인가. 어리고 젊을 때야 지성이 없어도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하는 40줄 정도 되었을 때는 지적 풍미가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삶에는 4가지 길이 있다. 본능의 길, 감성의 길, 이성의 길, 지성의 길.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지성이 빠진 3가지 길만 걷다 가면 아쉬운 삶이다. 나이가 들어 감성상태, 본능상태로 되돌아가면 자신도 힘들지만 가족도 힘들고 주변도 힘들어진다. 스스로 곱씹어볼 이야기다. 우리의 자녀, 조카, 후배, 제자, 부하들도 곱씹어보게 해야할 이야기다.


To be continued~

(도움되셨다면 다른 분들에게도 공유 부탁드립니다^^)




꿈이 현실이 되도록 돕는

대한민국 꿈메신저 김상경 올림

(코칭 · 강의 · 칼럼 문의: sangkyung.kim@gmail.com/010-7111-6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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