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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기획가 Mar 23. 2022

지나친 의전은 무감각보다 못하다

기획의 이해

회사 선배 중에 야망도 있고 의전을 잘했던 A 선배가 있다. A 선배와 함께 일한 기간이 5년인데  2년은 같은 부서원의 위치였고 이후 3년은 파트장으로 승급하여 나의 직속 리더였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이 많았다.

 

일전에 A선배가 다른 팀 임원 B와 함께 미국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참고로 나는 기획부서에서 일하기 때문에 다른 팀 임원과 출장을 함께 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해외 고객에게 이슈가 발생하여 공동 대응하기 위해 A와 B임원이 함께 출장을 떠난 것이다. 이슈는 원만히 해결이 되었고 예정대로 A는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B 임원은  다른 업무 처리를 위해 같은 날 새벽 미국 국내선을 타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A는 새벽 3시에 일어나 B를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잠깐 눈 붙인 뒤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 수준의 의전은 거의 주재원 업무에 해당하는 것이다.  에피소드를 전해 들은 나는 놀라움과 걱정 이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운전이 매우 서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그것도 새벽에 나의 직속 상사도 아닌 다른 팀 임원을 공항까지 운전해서 배웅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걱정의 정체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염려였다. 이렇게 의전을 못하니 올라가더라도 한계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 일이 나름 신선한 충격이어서 친하게 지내는 회사 남자 후배에게 너라면 그 상황에서 A와 같이 할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배 왈 직속 상사여도 외국에서 새벽 운전이 자신 없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볼 것이며, 다른 부서 임원이면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웬만한 야망 아니면 아무나 그렇게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 일을 계기로 A를 의전에 대해 감각이 보통 이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의전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제공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부담스럽게 느끼기 마련이다. A의 뛰어난 의전 감각은 상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나 가끔씩은 과도한 준비로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해외 출장 이후 고객사에서 B 임원게 요청을 한 것이 있다. 우리 회사에서 공급한 제품을 이용하여 고객사에서 서비스를 론칭하게 되 자축하는 행사가 진행될 예정인데 그때 사용할 축하 메시지를 영상편지 형태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내부적으로만 사용할 것이니 특별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며 휴대폰으로 1분 이내 촬영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수요일 요청 메일이 왔고 빨리 촬영해서 일요일까지 회신을 달라고 했다. 회사 대 회사의 공식 업무 요청이라기보다 B 임원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듯한 분위기였다.

 

고객사에서는 가볍게 요청했지만 받아들이는 을의 입장에서는 마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논의가 이루어졌다. A는 1분 내외 짤막한 영상이라도 회사 밖으로 전송되는 순간 회사를 대표하게 되므로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는 나에게 사내 방송국 PD에게 연락을 해서 협조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봄과 동시에 회사 안에서 촬영하기 적합한 장소고급 사양의 디지털카메라도 구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지시를 했다. 


논의를 마친 시간이 수요일 오후였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목, 금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남겨진 시간이 촉박했다. 방송국 PD는 일주일 전 업무 연락이 필요해서 섭외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직접 촬영하기로 했다. 내가 빌린 디지털카메라가 너무 무거워 혼자 들기가 버거웠고 도와줄 남자후배가 필요했다. 결국 A선배가 전체 업무 코디네이션을 하고 카메라 장비 나르고 촬영하는 것은 남자후배,  나는 촬영 후 편집하는 것으로 업무를 나누되 끝날 때까지 3명이 같이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B임원에게 영상을 찍자고 했더니 갑자기 회의가 생겼다, 지금 다른 업무를 해야 한다며 촬영을 미루는 것이다. 아무리 비서를 통해 일정을 잡고 임원석에서 대기하고 있어도 타나지 않아 허탕 치는 경우가 2,3번 발생했다. B임원과 업무를 할 때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해결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은 유독 이상하게 느껴졌고 의도적으로 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금요일 퇴근시간이 되었고 B임원을 대기하느라 , 금 이틀허탕 쳤다. 결국 1도 진행되지 않은 이 일 때문에 주말에 출근해야 되나? 고민이 되었다. 결국 A선배가 남아서 처리하고 혹시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를 하면 바로 출근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주말 동안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고 과연 동영상 촬영 건이 잘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다음 월요일 출근했을 때 A선배에게 물어봤고 그때서야 미심쩍었던 부분이 모두 해결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금요일 녁 8시쯤 B임원이 A선배에게 본인의 자리로 오라고 했고 B임원이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내가 사실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  해야 되는 일인지는 알지만 카메라 들고 3명이나 찾아오니까 좀 부담스럽더라고. 금은 대부분 퇴근해서 사람도 많이 없고 조용하니까 그냥 내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찍."


그렇게 B임원의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2, 3번 찍고 가장 잘 나온 것으로 골라 편집 없이 메일로 발송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B임원의 솔직함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평소에 호탕한 성격에 콘퍼런스에서의 스피치나 몇 백 명 대상으로 하는 발표도 잘하셔서 카메라 울렁증은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A의 잘못된 판단으로 촬영부터 메일 발송까지 30분이 걸리지 않았던 일을 3명의 인력이 이틀 넘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기획팀의 업무에 임원을 보좌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번 해프닝은 과도하다 못해 6MM(3명 x 2일)의 낭비였던 셈이다.

 

차라리 A가 둔감하여 고객사의 요청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면 쉽게 지나갔을 일이었다.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나친 의전 감각은 때로는 무관심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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