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이지만 고등학생 때 실습생 신분으로 나와 같은 회사에 취업을 했다가 그만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한 명은 대학생 때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였고, 또 한 명은 교회에서 만난 동생이다. 그들은 회사를 잠깐 다니다가 그만두고 대학을 진학하여 첫 번째 회사와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입사-퇴사 이야기에는 공통적인 플롯(?)이 있는데 바로 "그땐 일이 너무 힘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나오고 보니 다른 일도 힘든 건 마찬가지더라. 좀 더 참아볼걸 그만둔 게 후회된다. 그러니 너는 그만두지 말고 오래 다녀라."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 시절에 꽃길이 있을까? 모든 것이 어렵고 혼나서 서럽고 화장실에서 물 틀어놓고 숨 죽여 울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조금 더 힘들 수는 있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돈 버는 일에는 각각의 고충과 애환이 있다는 사실, 여길 나가도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참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비슷한 시기에 사회에 진출한 선후배, 친구들과의 네트워크로 얻게 된 정보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영업직이 아닌 개발자임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으로 입사를 한 친구는 신용카드 신규 가입 100건, 통신사로 입사한 친구는 핸드폰 신규 개통 5명이라는 할당을 받았다. 본인과 가족, 친지를 동원해도 그 기준치를 채우기가 쉽지 않으니 친구들에게도 품앗이 형태로 부탁하곤 했다. 문제는 이 할당을 적당히 잘 채워야 하는데 적당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눈치껏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적이 너무 우수하면 영업직으로 뽑혀가고, 너무 저조하면 고과에 반영되므로(상사와의 면담은 덤) 눈치 싸움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이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선배 중 한 명은 "나는 개발하려고 왔지 폰팔이 하려고 이 회사에 입사한 게 아니다"를 외치며 퇴사했다. 졸업할 때 성적이 수석이었던 또 다른 친구는 몇 달 동안 하는 일이 복사 100장에 호치키스 찍는 일이라며 출근할 때마다 현타가 온다고 했다. 친구들의 회사는 근무지가 여의도, 강남이고 연봉도 더 높아 내가 부러워했던 조건이었는데 입사 이후 또 다른 스트레스가 있었다. '내가 카드 100장을 가입시킬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그에 비해 나의 애로사항은 지방 근무와 1년 내내 진행되는 교육과 연수, 스터디와 세미나였다. 특히 연수받을 때는 몇 주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강원도에서 카드섹션을 연습해야 했다. 재미난 사실은 나는 몸으로 때우는 게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였고, 내 친구들은 카드 100장 신규 가입하는 것이 감당할 만한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다시 고졸 입사자 지인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들이 힘들었던 것은 또한 일하는 친구들은 다 같은 회사, 다른 친구들은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좁은 네트워크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버는 일이라면 겉으로 좋아 보여도 실상은 또 다른 스트레스가 있음을 몰랐기에 지금 일이 제일 힘들다고 나만 제일 힘들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이지만 계속 일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할 만한 일인 것이다.
고졸 입사자가 힘들다고 울면서 전화했을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돈 버는 일은 다 힘들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 좀 더 있어봐라."라고 하셨다면 서러움 폭발했겠지만, 다른 회사 다니는 친구가 나도 똑같이 힘들다는 말을 했다면 다르게 와닿았을 것이다. 때론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