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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기획가 Jun 12. 2022

문화예술, 현실과 타협하기 어려운 그 영역

직장인의 이해

어제 오랜만에 사촌 오빠 A 가족을 만났다. 다른 지역이 다르고 각자 일하는 곳도 다르다 보니 (게다가 사촌오빠는 지방근무로 주말부부임) 지난 10여 년간 얼굴 본 일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였다. 나의 첫 번째 집들이, 사촌동생 결혼식, 할머니 장례식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집들이였던 어제.


사촌 오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시간만큼 천방지축이었던 3살 조카가 어느새 아빠 키에 근접한 중 2가 되었고, 깍쟁이 차도녀 같았던 올케 언니도 배울 점이 많은 육아 선배맘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빠지지 않고 화제에 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A 남동생인 또 다른 사촌 오빠 B이다.


B는 서울예술대학교 영화학과 출신으로 영화배우이다. 충무로 이력이 벌써 몇십 년째. 굵직굵직한 영화에도 많이 등장했다.

내 기억상 가장 최초의 영화는 박중훈, 김보성 주연의 <투캅스 2>였고 소식 모르고 영화관 갔다가 스크린에서 오빠 얼굴을 발견한 적도 많았다. 영화관을 자주 찾지 않는 내 기억에도 <범죄와의 전쟁>, <도둑들>에 출연했으니 천만 관객 동원에도 성공한 셈이다. 얼굴도 클로즈업되어 스크린에 꽉 차는데 문제는 출연시간이 5분 미만, 대사도 한 줄 안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 20년이 넘는다 하아 ㅠㅠ


처음 유명한 영화에 등장했을 때는 금방이라도 톱스타 대열에 들어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속도가 너무 더뎠고 너무 제자리였다. 피 끓던 젊은 시절에는 열정으로 참고 버티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그 시간이 10년이 넘고 20년이 넘어가니 다들 "언제쯤...?"이라는 질문을 하기도 민망해진다. 무명의 시간이 길어지니 교제하던 아가씨와도 헤어지고, 부모님은 두 분 다 이미 돌아가셨고, 코로나로 올 스톱된 지난 2년은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중 2 조카(A의 아들)도 우리 집안의 가장 큰 리스크는 삼촌(B)라고 말할 정도... 누구보다 잘 되길 바라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답답할 노릇이다.


B를 마지막에 만난 것이 할머니 장례식이었다. 코로나 첫 해로 대구경북 봉쇄 조치가 내려졌을 때라 빈소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었고 정말로 직계 가족만 참석했다. 미리 말을 맞춘 듯 나도 사촌형제들도 배우자와 아이들 대동하지 않고 딱 본인만 왔다. 장례식 3일 내내 직계 가족들끼리 먹고 자고 온갖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데 오랜만에 성인이 된 사촌들이 모였으니 자연스레 B에게도 최근 무슨 작품을 하고 있는지 질문이 나왔다. 그때 B의 대답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출연할 수 있었는데..."였다. 그에 대한 반응은 일동 잠시 정적...이었다.

사촌들 대부분이 직장인이다 보니 영화배우는 평소에 과연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B는 영화를 찍지 않는 기간에는 오디션도 보고 시나리오 검토도 하고 콘셉트 회의도 한다고 했다. 직장인이라면 이 모든 시간에도 급여가 나오지만 문화예술가에게는 결과물이 없는 그래서 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인고의 시간이라는 것.


A의 가족이 돌아가고 나서 신랑이 사촌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신랑 사촌 중에도 성악을 전공하여 미국 유학을 가서 현지에서 취업을 한 동생이 있다. 2~3년 전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귀국했는데 그의 직업 역시 뚜렷하지 않은 듯했다. 간간이 아르바이트하는 정도? 그 역시도 20년 가까이 성악 외길만 바라보고 살았던 인생이니 다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그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신랑 역시도 한숨을 내쉬며 "5년 10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장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사지 멀쩡하고 배울만큼 배웠고 이제 아버지도 환갑 넘은 나이인데 아직 자립을 못하면 어떡하냐."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도 학창 시절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고 꿈이 작가였지만 가난이 무서웠기에 글쟁이는 배고프다는 아버지의 말이 귀에 쟁쟁 울렸기에 나의 진로는 항상 취업이 잘되는 쪽이었다. 내 꿈을 저버려야 한다고 신세 한탄을 했지만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떨쳐본 적이 없었다. TV에서 보는 영화배우들의 수상 인터뷰에서 말하는, 수십 년 무명생활을 견딘 그 예술가 정신과 장인 정신에는 박수를 보낼 수 있지만 내 주변 사촌들에게는 마냥 그럴 수가 없는 나의 이중성도 안다. 그의 장인 정신으로 인해 나머지 가족들의 어깨에 짐이 더 올려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영수배우님처럼 나이 70대에 꽃 피면... 예술인생은 성공인지 실패인지 뭐라 말해야 할까.


내 딸이 커서 예술을 하고 싶다면 나 역시도 먹고살 것은 마련해놓고 취미로 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아주 부자여서 자손 대대로 먹고살 수 있다면 맘껏 지원해주겠지만 현실을 알기에 현실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음을... 현실과 타협한 나는 그래서 예술가는 되지 못하고 직장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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