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영국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본사로 복귀하신 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영국에서의 생활과 아이들이 다녔던 국제학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부장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다.
"우리 애가 이제 2학년인데 걔는 필기체를 자연스럽게 쓰더라고. 난 흉내도 못 내는데 말이야.
내 자식이지만 신기해."
그렇다.
한국에서 영어를 학습으로 접하고 배운 사람에게 필기체는 말 그대로 꼬부랑글씨이며 넘사벽이기도 하다.
필기체 에피소드 둘.
전화와 이메일로 소통하던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손 편지를 받았는데 맙소사, 한 페이지 빡빡하게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도저히 해석 불가한 글자였는데, 차마 선생님한테 필기체를 못 읽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기에는 한마디로 쪽팔렸고 결국 신랑의 회사 동료 중 유학파 출신에게 부탁해서 이탤릭체 번역본(?)을 받을 수 있었다. 필기체를 읽지 못하는 것이 영어를 잘 해석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필기체는 평생의 숙제처럼 언젠가는 배워야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마이키에서 <누구나 쓸 수 있는 아메리칸 커시브 원데이 클래스>를 발견했다.
뒤늦게 공지를 발견하고 다음 클래스가 열리기까지 몇 달을 더 기다려 드디어 수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먼 거리는 아닌데 초보 서울러여서 브라운 팍스 스튜디오까지 가는데 10분 지각했다.
앞부분 설명은 놓친 상태에서 바로 쓰기에 돌입했다.
이 수업에 쓰려고 만년필도 얼마 만에 꺼내보는 것인지.
(전날 밤새도록 펜촉을 물에 담가 굳은 잉크 찌꺼기를 빼낸 것은 안 비밀)
x-height와 ascender, descender 등
새로운 용어의 혼란과60도 각도로 눕히고 곡선과 타원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것이 글씨인가 그림인가.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나오는 시간이 2시간 지나자 어라? 뭔가 좀 되어가는 느낌?
이제 겨우 감 잡았다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이제 작품 들어가시죠?"
"네...?"
"다 됩니다."
그래서 홀리듯이 시작했다. 진짜 시작하고 3시간 만에 만들어졌다. 물론 마지막에 선생님의 마법의 터치가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만든 것임.
문장은 최근에 완독한 <빨간 머리 앤>의 마지막 구절.
쓰는 동안의 힐링과 집중, 그리고 끝났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사진 찍어서 지인들한테 보여주니 다들 "오늘 처음 필기체 배워서 3시간 만에 만든 거라고?" 이런 반응이다.
한동안 모닝 루틴처럼 태백산맥 필사를 열심히 했는데 어느새 그만둔 지 몇 년째다.
그만두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한글은 쓸 때도 단조롭고, 다 쓰고 났을 때 원고지에 쓴 내 글씨가 너무 예쁘지 않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아메리칸 커시브를 배우니 영어 성경이나 영어책을 필사하고 싶은 의욕이 아주 뿜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