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결정의 순간이 올 때 또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가까운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조언을 하기도 한다.
지인에게 조언을 하는 것은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나를 잘 아는 관계이니만큼 나에게 도움이 되는 팁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에 기반한 애정 어린 조언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벌써 십 수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내가 입사를 하고 1년쯤 된 3월의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내려 꽃샘추위라고 뉴스에서 나오던 날,
금요일 오후 3시쯤으로 기억되는 그때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족인지 병원인지 누구의 전화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응급실로 이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일일까? 교통사고인가? 바로 돌아가시는 건가?'
부장님께만 간단히 말씀드리고 자리 정리도 제대로 못한 채 사무실을 뛰쳐나와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볼 수 없었고,
이모와 오빠가 대기실에 있었다.
엄마는 수영 수업을 마치고 샤워실에 있는데 갑자기
한쪽 팔이 마비가 오면서 축 늘어지듯 스르르 쓰러졌다는
것이다. 수영 코치의 응급처치로 병원으로 바로 옮겨져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다음날 수술을 한다고 했다.
CT 촬영 결과 머릿속에 서 혈관이 터졌고 피가 고여 있는
상태라고 했다. 아무런 지병이 없이 건강하셨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담당의사가 왔고 수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가느다란 관을 꽂아
고여있는 피를 뽑아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빠와 내가
보호자가 되어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수술은 다음날이기에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해준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바로 사망할 수도 있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고,
기억을 잃을 수도, 말을 못 할 수도, 마비가 와서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최악의 상태를 먼저 알려주고 뒤로 갈수록 희망찬
이야기이긴 했으나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엄마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수술실로 옮겨가기 직전에 침대에 실려가는
엄마를 보았다. 머리는 빡빡 밀려있었고 목소리도
짐승 울음소리처럼 이상했고 헛소리도 했다.
여기가 어딘지, 왜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실려가는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스치듯 잠깐 보고 나서는
5시간이 넘는 수술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진행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피가 고여 있던 자리의 뇌세포는 죽어버렸고
그 뇌세포가 담당하던 기능은 역할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영역은 다행스럽게도 기억이나 언어 쪽이 아닌
운동 기능 쪽이었다.
일단은 목숨은 살렸기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기에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왔지만
이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엄마는 신체의 왼쪽이 모두 마비가 와서
왼손과 왼발을 쓸 수 없었다.
단순히 왼손, 왼발의 문제가 아니었다.
걷는 것은 고사하고 침대에 혼자 앉거나 돌아눕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갈 수 없으니 기저귀를 차야 하고
누워 있는 방향도 시간마다 바꿔줘야 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숟가락으로 밥 먹기, 양치
뿐이었다. 밥을 먹거나 양치를 할 때도 벌어진 입 사이로
물과 음식물이 줄줄 흘러서 누군가 닦아주어야 했다.
한마디로 아기를 키우듯 누군가 24시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오빠도 일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직계 가족은 더 없으니 24시간 간병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간병인 비용은
하루 5만 5천 원, 10일마다 현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한 달 30일이면 165만 원인데 내 월급이 170만 원이었다. 간병인 비뿐 아니라 병원비도 내야 했다.
보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돌아가신 아빠가 남기신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 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간병인 비는 내가,
병원비는 오빠가 담당하기로 했다.
내 월급과 맞먹는 간병인비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병원비와 간병인비도 언젠가 줄어들겠지만
내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다.
그 와중에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간병인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네가 직접 간호하는 게 낫지 않아?"
이런 말을 들으니 나 역시도 고민이 되었다.
나 혼자 다른 지역에서 회사를 다니는 것이 이기적인 것인지,
엄마를 위해 옆에서 간병하는 것이 나은지,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이고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회사에서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원래 내가 있던 부서는 국내 제품만 담당했기에
국내 출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아(중국+아시아) 부서가 새로 생기면서 각 부서에서 한 명씩 선발해서 인력을 충원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담당 지역인 아시아가 이름만
아시아지 권역이 꽤 넓었다.
흔히 생각하는 일본, 동남아 수준이 아니라 인도를 넘어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까지 아시아, 때론 아프리카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는 한번 해외 출장을 갔다 하면 한 달씩 머무르기도 했고, 로밍도 원활하지 않았던 때였다. 한마디로 출장 한번 간다 하면 연락두절되고, 친구사이에는 싸이월드로 근황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이런 근무 환경이어서 나는 엄마 때문에라도 부서를
옮기면 안 되겠다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내가 있는 부서에는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고,
또 새로 부임하게 되는 부서장은 인사기록카드를 보고
나를 딱 찍어서 발령을 내버렸다.
내가 선택된 이유는 상용화 모델을 개발해 본 경험이 있는
3년 차 사원에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됨)이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었고, 담당과장님께
부서이동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조직의 생리에 대해 잘 몰랐던 그때는 지금 부서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고, 불복하면(?) 퇴사하게 되느냐고 물어봤다.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 퇴사도 고민하고 있는데 출장 많이 가는 부서는 부담스럽다는 동정심에 호소도
해보았다. 그에 대해 부서장인 과장님은 이미 위에서
결정된 상황이라서 누구도 막아줄 수 없다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희영 씨, 사정은 알지만 부모가 인생 대신 살아주지 않잖아.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야. 자기 앞날을 먼저 생각해."
뎅~ 부모가 인생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종을 치듯 귓가에 울렸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자잘한 고민이 일시에 사라졌다.
누가 바라지도 않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장님의 말씀에 마음이 가벼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를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인도, 베트남, 대만, 이스라엘...
매번 다른 나라로 해외출장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옆에서 보아도 신나게 회사생활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엄마의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게 되었을 때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의 반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셨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엄마의 입원기간은 4년으로 짧지는 않았지만 병원비는
점점 줄어들었고 내 연봉은 점점 올라갔기 때문이다.
김미경 작가도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가장 큰 효도는 자식이 본인보다 나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20대 중반,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해서 장래가 창창한 딸이 회사도 그만두고 병원에서 수발들고 있으면,
그리고 그 퇴사로 인해 경력도 끊기고 재취업도 어려워
일용직을 전전하게 된다면 엄마는 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나에게 퇴사조언을 해주었던 그 친구와는 삶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그 친구가 나를 걱정하고 염려했을 마음에 대한 의심은 없다. 그 역시 부모님이 아프신 경험이 있기에 아마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내게 혼란을 주었다.
그가 살아온 환경, 현재 처한 상황에서는 최적의 방안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잘 알고 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진심 어린 조언이라고 해서 꼭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폭력이나 감정적인 학대가 될 수도 있다.
어설픈 조언보다 위로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저 휴지를 건네주거나 조용히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