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3년 차 시절, 엔지니어였던 나는 개발할 때 협력업체와 함께 일했다. 그 당시 본사의 지침은 업체를 활용해서 본사의 리소스를 최소화하는 것이어서 신입사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팀원들은 담당 협력 업체 한 두 군데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 협업했던 업체는 코딩과 디버깅을 담당하고 승인과 이슈 발생 시 대응하는 일은 내가 담당했다. 그래서 출장을 갈 일이 있으면 일정을 맞춰 함께 떠났고 현지에서의 생활도 거의 함께했다. 사원 3년 차 나의 위치는 부서에서는 거의 막내였지만 업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갑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구력이 길지 않던 나로서는 나보다 연장자인 업체의 팀장에게 업무지시를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뼛속 깊은 유교걸이라 연장자에 대한 공경, 우대, 예의가 있었고 기본적으로 쓴소리, 싫은 소리를 잘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나의 이미자는 좋은 편이었다.
한 번은 이스라엘로 업체와 함께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현지에서 승인을 받기 위해 문서작성과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해당기관에 제출을 했는데 fail이 되었다.
fail의 원인은 시차에 따른 시간의 오류였다.
즉 사람이 수작업으로 작성한 문서에는 한국 시간 기준으로 날짜를 기록하였는데 프로그램에는 컴퓨터 기준 시간인 이스라엘 현지 시간이 기록되어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났던 것이다.
나는 별다른 코멘트 없이 업체에 날짜 오류로 fail이 발생했고 재승인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만 조용히 전달했다. 이 작업은 모두 업체에서 진행했지만 최종 검토를 제대로 안 한 나의 불찰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의 사수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일정이 딜레이 된 것에 대해 업체 팀장을 무섭게 혼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움찔할 정도였다.
그 일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업체에서 나와 선배를 부르는 별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천사라 불렸고 사수선배는 마녀라고 했다. 당시는 나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음에 만족하며 재미있는 별명이라고 웃고 넘겼다.
그것이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가끔씩 그때 일이 생각난다. 나는 업체에겐 천사 같은 본사 담당자였겠지만 나의 상사가 보기엔 베 부러지지 못하고 업체 관리 찰 못하는 물컹한 후배였던 것이다.
내가 천사 이미지로 대외적인 평판만 좋을 때 실제로 일 잘하고 모든 이슈를 쾌도난마처럼 해결하는 사람, 팀에서 에이스로 불렸던 사람은 마녀로 불린 사수였다.
모든 사람에게 호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책임져야 할 일과 후배가 많아지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역도 필요하다.
그러니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역할에 따라 좋은 사람도 악역이 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면 일을 하는 것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