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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기획가 Sep 27. 2021

기획자 필력의 최고봉은 바로 대필

기획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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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년생 시기 사장 또는 대표이사의 메일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와 윗사람들은 메일을 참 길게 잘 쓰는구나'였다.  
연초에는 "경영위기지만 올해도 잘해봅시다"라는 신년인사 메일, 휴가철이나 연휴가 되면 "저도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옵니다", "가족들과 리프레쉬 잘하고 에너지 재충전합시다", 연말이 되면 "임직원 여러분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등등
어쩌면 이렇게 매 시즌마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메일을 보낼 수 있는지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이분들은 생각보다 여유로우신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기획팀으로 부서를 이동하고 나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 메일을 대신 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 이걸 직접 쓰는 게 아니었구나, 누군가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많은 일정을 소화하며 바쁘신 분들이 읽을지 안 읽을지도 모르는 A4용지 한 페이지 분량의 신년사를 직접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또한 그 메일들이 비록 외부 언론에 노출되는 보도기사는 아니지만 한 회사의 수장으로서 하는 말에는 공신력과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쓸 수도 없는 무게감이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비정기적이지만 메일 대필부터 시작해서 콘퍼런스 등의 행사가 있을 때 담당 임원의 발표자료와 발표자료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있다.
(참고로 발표자료의 스크립트는 상사 스타일마다 다르다. 스스로 모든 내용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하기에 프레젠테이션 자료만으로 충분하다는 분도 있고, 써준 대로 외어서 발표하기에 국문/영문 2가지 버전 모두 달라는 분도 있다.)
내가 그 일을 안 하면 같은 부서 내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빈도의 차이일 뿐 기획자에게 있어 대필 업무는 상시업무와 같다.

어떻게 보면 대필은 보조원 업무처럼 보인다. 긴급성을 요구하지만 하나하나의 일이 성과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필 업무야 말로 상사의 신뢰를 받는 업무이다. 상사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고 상사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사의 평소 자주 쓰는 문투와 습관까지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줬다고 알아차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려면
 거의 상사 인양 빙의되는 것과 비슷하다. 상사가 누군가 대신 써 준 메일 초안을 한번 쓱 읽어보고 조금의 수정도
없이 바로  발신한다면 그는 신뢰받는 대필 가이자 신뢰받는 최측근인 셈이다.

대필은 지시한 상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체 가능하다.그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아닐지라도 무언가 어색하고 말로 표현하기 모호한 약간의 어색함에서도 교체는 발생할 수 있다. 결국 기획업무를 함에 있어 필력의 최고봉은 대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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