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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형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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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폴 Oct 04. 2021

폭력의 끝

글의 내용은 피해자 보호와 사건 보호를 위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각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시내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급 빌라의 널찍한 거실에 고인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보니 벌써 자녀들이 도착해있다. 작고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파가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딸의 품에 안겨 무심히 고인을 바라보고 있다.


큰딸이 엄마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오빠와 두 동생에게 알려 모두 부모님이 사시는 빌라로 모였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고 112신고를 했다고 한다.


형사님, 잠시 드릴 말씀이...


큰 아들이 다가와 조용히 대화를 청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해한 것 같다고 한다. 도착했을 때 아버지 얼굴에 수건이 덮어져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노인은 여전히 딸의 품에 안겨 무언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중얼거린다. 부모님 댁에 모인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팔을 주무르고 손을 만지작거린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내가 그랬어


노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어. 무서워서 그랬어.' 그러고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다시 중얼거린다. 큰 딸이 노인의 등짝을 쓰다듬어 내리며 '엄마, 괜찮아, 괜찮아' 하며 노인을 달랜다.


아버지는 무서운 폭군이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머니와 자녀들을 심하게 두들겨 팼다. 어머니에게는 더욱 심한 매질을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아 병원에 실려간 일도 여러 번이었다.


국이 조금만 짜도, 반찬이 조금만 싱거워도, 대답을 조금만 늦게 해도, 버럭 화를 내며 욕설이 시작되었고 대답을 하면 말대꾸를 한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물어보는데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트집을 잡다가 이내 밥상을 둘러엎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새 노부부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 모진 세월을 견딘 어머니는 요즘 노인정에 나가 또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아버지의 포악한 기질과 행동은 노인이 되어도 여전했지만 그나마 지난해 풍을 맞고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야 이 씨발년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또 타박을 들어야 했다. '이런 걸 반찬이라고 주냐? 평생을 맞아도 고치지를 못하네, 덜 맞아서 그러냐?' 아침을 먹다가 또 생트집이 시작되자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일어나 '노인정에 다녀올게요'하고는 현관에서 밀차를 잡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기어이 아버지가 불편한 다리를 절며 쫓아와 '야 이 씨발년아, 이런 걸 밥이라고 주고 너는 놀러 가냐? 이 개잡년아'하고는 아직은 성한 커다란 주먹으로 어머니의 머리통을 '쿵' 쥐어박았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세상이 온통 하얘졌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데 커다란 주먹이 다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어머니는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잡고 있던 밀차를 돌려 아버지를 밀었다.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어, 이 년이' 하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그만 뒤로 넘어졌고 '쿵'하고 바닥에 머리를 찧고는 그대로 누워있었다.


'쿵' 소리에 놀라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돌아본 어머니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아버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이 일어나면 나를 또 때릴 텐데, 내가 자기를 밀어서 넘어졌으니 더 심하게 매질을 하며 욕을 할 텐데, 이전에 모질게 맞았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극심한 공포와 불안이 온몸과 정신을 휘감았다. 어머니는 어느새 밀차에 싣고 다니던 수건으로 아버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고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와 가끔 응응 거리던 신음 소리는 한참만에 조용해졌다.


이렇게 한 가정의 비극은 막이 내렸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던 피해자는 그 무서운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게의 공포와 자괴감을 안고 힘겹게 살아내야 했을까. 그리고 결국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여성 재소자들 중 이처럼 폭력에 시달리다가 배우자를 살해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을 폭력에서 구해냈으면 그들이 살인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살인 피해자들도 목숨을 잃는 일이 없었을 텐데. 결국 피해자들을 죽게 만든 사람은 피해자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없애기 위해 사회는, 경찰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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