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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폴 May 07. 2019

75번 버스

시간은 공간을 품고...




30년 만이다.        


동생이 개업한 사무실에 들렀다가 엄마 집에 가기 위해 근처 정류장에서 75번 버스를 탔다.

고딩 시절 원미동에서 살던 나는 아침이면 10여 분을 걸어 나와 75번 버스를 타고 송내동으로 학교를 다녔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가까이 있어서 등교시간이면 학생들을 한 가득 싣고 달렸다.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버스는 더 이상 사람이 탈 수 없을 것 같았는데도 버스기사 아저씨의 클러치 신공으로 학생들을 뒤쪽으로 쭉쭉 밀어내면서 정류장마다 기다리던 그 많은 학생들을 모두 태웠다. 손잡이가 달려 있는 봉을 꽉 움켜잡고 흔들리며 치이며 가다가 지쳐갈 때쯤 마침내 학교 뒷문 근처 정류장에 버스가 서고 드디어 버스에서 내리면 무슨 큰 일이라도 치른 것처럼 해방감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버스 안은 늘 왁자지껄했고 저 뒤편에 예쁜 여학생이라도 보이면 아닌 척하면서 힐끔힐끔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근처에 학교 선배라도 있으면 발을 밟거나 선배를 밀지 않으려고 기사 아저씨의 클러치 신공에도 봉을 놓치지 않고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학교 아이들과 은근히 힘 겨루기도 했고 가끔은 친구들끼리 욕지거리를 섞어하는 대화를 들은 선배들에게 싸가지가 없다며 불려 가기도 했다.


대성병원      

내가 버스를 탔던 정류장에는 '중앙극장'이라는 커다란 극장이 있었는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꽤 오랫동안 운영을 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지금처럼 영화를 보러 가기가 쉽지 않았던 그때 학교에서 단체로 '람보'와 '위트니스'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어우동'이었던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본다고 들어가서 맨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쫓겨나기도 했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 건너편에는 방과 후에 자주 갔었던 '수목 그리고'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수목'이라고 불렀다. 그곳은 주로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 영상을 상영해 주고 디제이 형이 사연을 받아서 노래도 틀어주는 곳이라 우리들에게 인기 있는 아지트였는데 거기에 가면 중학교 때 친구들까지도 다 모여 있었다. 근처에서 가끔 호프를 마시고 술을 깨고 집에 가기 위해 들르기도 했다.  


부천역  

부천역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큰 사거리를 지나다니려면 사람들과 스치지 않고는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광장으로 나오면 5층짜리 로얄백화점이 있었는데 종종 사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구경을 하기도 했었다. 광장 앞 쪽 먹자골목에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었는데 춤도 잘 못 추면서 친구들과 가끔 놀러 다녔다. 한 번은 옆 테이블에 있던 군인 아저씨들과 시비가 붙어서 큰 싸움이 일어날 뻔한 적도 있었다. 소신여객 뒤편으로는 큰 오락실들이 몇 개 있었는데 스트리트 파이터가 한참 인기였다. 나는 스트리터 파이터보다는 테트리스나 1942 같은 게임을 많이 했다.


버스가 부천역 광장 사거리에서 전화국으로 가기 위해 우회전을 하면 사거리 바로 오른편에 '훼밀리'(Family)가 있었다. 롯데리아 같은 햄버거 가게였는데 성조기 모자를 쓴 독수리가 캐릭터로 그려져 있었다.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 곳을 가도 친구들 한 두 명은 꼭 있었다.


전화국

부천역에서 전화국으로 가는 길에는 건물 2층에 만화방이 있었다. 500원인가 1,000원을 내고 하루 종일 만화책을 볼 수 있었고 배고프면 라면도 사 먹을 수 있었다. 가끔씩 하루 종일 만화책을 실컷 보고 왔는데 이때 까치 시리즈와 독고탁 시리즈는 거의 모두 본 것 같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추억을 지나쳐 가면서 그 앞 길거리를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걷기도 했고, 소란스럽게 떠들며 호기를 부리며 활보하기도 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술에 취한 친구 녀석이 서 있는 순찰차를 발로 찬 덕분에 죽어라 뛰어 도망치는 모습도 보였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그 길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리 변하지 않은 그 공간 하나하나가 내 그때의 시간을 품고 있는 듯했다. 품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 녀석들 얼굴도, 이름도 하나하나 떠올랐다.  

 

75번 버스, 가끔 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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