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키리코
인생은 홀로서기
내가 어릴 때 실존주의 철학에 감명받고
자주 외쳤던 말이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실존이 우선이고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스스로 결정하여 자신의 본질을 창조해 나간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이는 샤르트르가 한 말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지만
결국 나 혼자 헤쳐나가야 되는 인생이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것도 무척 좋아한다.
사람들을 좋아해서 하루에 모임 약속을
두세 개씩 잡아서 만나기도 했는데
확실히 사람들을 만날수록 더 활력이 생기고
에너지가 올라간다.
하지만 독고다이처럼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혼자 새로운 걸 배우러 다니거나
혼여(혼자 여행)도 혼밥(혼자 밥)도
혼영(혼자 영화)도 좋아한다.
혼자를 즐길 때 꽂혔던 작가와 작품이 있다.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펼쳐 보며
작품에 매료되어 푹 빠져들었다.
초현실주의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잠재한
꿈, 환상, 무의식, 공상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한 사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잠재한
꿈, 환상, 무의식, 공상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한 사조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선조와 같은 존재이다.
사실 형이상학적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형이상학적 회화란?
조형적 한계 내에서의
정신적 요구에 대한
총체적 표상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형이상학’은 감각적인 형체 뒤의
존재근거로 근본적인 정신, 본질을 의미
- 세계미술 용어사전
‘형이상학적 회화’를 쉽게 풀어보면
실체보다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미술로서 가시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작품들이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 당시 기계 문명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의 기계나 도시에 대해
외적으로 미적 표현을 추구한 접근에
반발하며 탄생하기도 했다.
왼쪽에 여자아이는 실제 모습인지 그림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어둡게 칠해진 모습으로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
멀리서 건물 뒤로 남성의 모습이 그림자로만
보이고 기다란 막대도 옆에 보인다.
저 남성은 여자아이를 기다리는 걸까?
왜 저곳에 서있는 걸까?
남성의 옆에 보이는 기다란 물건의 정체는?
여자아이는 저 남성의 존재를 알까?
이 장면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림을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뭔가 모를 공포감과 불안함이 올라온다.
건물은 똑같은 창과 아치가 계속 반복되고
오른쪽 가까이에 있는 건물과
왼쪽 뒤에 있는 하얀 건물의 원근법이
맞지 않고 과장되게 표현되었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그림자가
극단적으로 나눠진다.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배경으로
탁한 색감과 빛이 함께하니
공허함과 고요감, 고독감이 느껴진다.
키리코는 예술작품은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연구하며
존재자의 근원적 존재를 밝히는 과정에서
무(無)가 원초적인 시작이라고 하였다.
무에 대한 경험은 불안을 초래하고
불안이 클수록 무에 대한 경험이 커지며
이는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보았다.
키리코는 ‘예감’을 가장 강력한 감각이라고
말했는데 하이데거의 불안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작품에서 불안, 허무, 공포 등을 시각화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존재의 근거를
경험 시키고자 한 것 같다.
키리코의 작품은 어떠한 기억을 상상력을 통해
꿈의 장면처럼 표현하고 숨겨진 의미를
극대화한다.
나는 특히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함으로 보낼 때
외로움이 몰려와서 인생은 혼자라고 외쳐댔다.
키리코의 작품을 보면
뭔가 모를 희열감이 느껴진다.
내 마음과 공감이 되는듯하지만
내 마음보다 더 큰 음울함과 외로움이 보여서
상대적으로 내 고독감이 작아 보이기도 한다.
울고 싶을 때 영화를 보고 펑펑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하면서 시원한데
이처럼 마음속의 슬픔을 배설하는
카타르시스를 이 작품을 보며 경험했다.
내 고독한 마음이 작아 보이고
다 뱉어내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차분해졌다.
작품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져서
누군가에겐 와닿지 않거나
우울해 보여서 거부감이 드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곁에 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는데도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다.
아이러니하게
이 외로움과 고독감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살다가
오롯이 나만 있는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나쁘게만 보고 싶지 않다.
누구나 평범하게 느끼는 감정이고
일상으로 다시 올라오는 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고독감을 느낀다는 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기 때문에
그만큼 노력했고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독감을 즐기는 건
외로움과 우울감을 극복하는 방법이 된다.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드라이브를 가거나
혼자 아무도 모르는 타지에서 걸어 다니거나
혼자 조용한 카페에서 차 한 잔 즐기고 싶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혼자 살 순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도 개인에 집중했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을 탐구한 것 처럼
나와 타인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나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들이 있다.
혼자인 걸 좋아하는 나도
남편한테 크게 의지하는데
남편에 대한 기대가 커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갈등이 생기곤 한다.
남편과 한 몸이 되었지만 독립된 개체이고
내 몸에서 나온 아이들이지만
나랑 다른 존재들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하고
타인이 행복해야 내 행복도 따라온다.
나의 기대로 남편과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고
서로의 존중 속에서
같은 곳을 향해 동등하게 걸어가길 바란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 속
한 가정이 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