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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 너머 Jun 06. 2024

검은 모래: 화산섬에 묻힌 제주의 아픔들

#소설 검은모래 #해녀 해금 #제주의 4월

아이들은 4월, 어떤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을까?


제주에 오기 전에는 제주를 여행지 마냥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 전학 문제로 주소지를 옮기고, 제주의 작은 학교로 전학시키고 보니 아이들의 입으로, 아이들이 배운 제주를 듣게 되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나는 그저 머무는 이가 아닌 제주가 보낸 그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국제 바칼로레아(IB) 교육과정을 인증받는 과정에 있다. 3월은 IB 교육에서의 학습자상을 이해하고, IB에서의 다양한 개념을 익히고 경험하는 데에 쓰였다. 간간이 학부모 교육설명회, 학년별 교육과정 설명회도 있었다.

그리고 3월 말부터는 거의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사건이라고 칭하는 것이 그 오랜 아픔을 겪었고, 겪고 있는 분들에게 한 날짜의 흘러간 이벤트로 치부되는 것 같아 적절치 않은 것 같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이를 지칭하는 용어인 것 같다), 그리고 4.16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채워졌던 것 같다. 말이 그렇게 많지 않은 아들들에게 이 사건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나 보다. 묻지도 않았는데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서의 이야기를 했다. 나조차도 자세히 몰랐던 4.3 사건에 대한 조각들을 꺼내놓았다.


나도 내 방식으로 아이들의 추모에 동행해야겠다. 그 시대를 기록한 책들을 찾아서......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사실 나는 이미 다른 책을 이 여정의 첫 번째 책으로 골라놓았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본 제주의 근대사에 대한 <해녀들의 섬>. 마침 독서모임의 6월 책 추천 차례가 되어 이 책은 그때 함께 읽겠다며 아껴두고 또 다른 책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해녀 관련 연구 논문들을 검색하다 우연히 "제주 우도의 검은 모래밭에서 미야케지마까지 디아스포라 장소 담론 -구소은의 <<검은 모래>>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이 논문은 구소은 작가님의 <검은 모래>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쓰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재일한인 제주해녀(해금)의 이방인으로서의 이주 역사를 통해 공간(장소)의 의미와 인물들이 가진 정체성을 분석한 논문이다. 찾아보니 이 소설은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었고, 2018년 서귀포 시민의 책 선정도서란다(표선도서관에는 서귀포 시민의 책 선정도서 칸이 따로 있다!).


논문은 쉽지 않았지만 소설은 읽어보고 싶어졌다.



제주의 근대사를 들여다보자 파란 바다, 검은 바위가 먹먹하게 느껴진다


제주의 이국적인 풍경은 검은 돌, 검은 흙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검은 화산분출물은 맑은 날 넓게 펼쳐진 바다와 어우러져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푸른 바다, 검은 돌, 푸른 오름, 붉은 노을. 흰 눈에 붉은 동백, 노란 유채, 반짝임이 넘실대는 청보리밭, 연보라 갯무꽃, 하얀 안개 같은 메밀꽃, 분홍빛 융단 깔린 진달래밭까지... 겨울과 봄 겨우 두 계절을 지낸 내게 제주의 색은 명료하다. 희뿌연 건물들과 인공적인 색채에 둘러싸인 육지, 도시 사람들에게 이곳은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여행지이다.


하지만 이곳의 삶은 척박했고, 아픔이 많았다는 것까지는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이전엔 외국어 같은 제주어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우리를 이방인으로 여행자로 느끼게 했던 그 언어가 이곳에 여적 남아있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한 역사가 한 바구니나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내겐 제주가 아름답기만 한 여행지는 아니다.


이 소설이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제주 4.3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심지어 이야기의 주요 배경도 온전히 제주는 아니다. 작품해설에서는 '검은 모래'에 대해 섬 속의 섬, 우도의 동쪽, 검은 모래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인 '조일리'를 언급했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쓴 저자는 이 책을 쓴 것이 일본(이 소설의 긴 배경 중의 하나인 화산섬, 미야케지마)에서의 경험, 황량한 폐허 속에 묻힌 이야기들이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소재가 책으로 나오기까지의 5년, 그 이야기 속에 제주가 함께 묻혀 있었고, 작가는 검은 모래에서 4대에 걸친 가족사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긴 제주의, 한국의, 일본 속의 한국의 역사를 건져냈다.

이야기의 시작이 어느 쪽이건, 검은 모래, 검멀레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끌려 나올 줄은 몰랐다.


구월과 박상지의 딸 해금, 하도리와 미야케지마의 해금


해녀 구월과 박상지는 해녀가 될 딸 해금을 낳았고, 기영을 낳았다. 해금은 한태주와 연을 맺어 켄을 낳았고,  일본인 양아버지 후쿠오와 해금에게서 자란 켄은 일본인 메구미와 결혼하여 미유를 낳았다. 미유는 우익 정치가 가문의 히로타 지로와 사귀다 헤어졌다.


우도는 구월의 고향이었고 구좌읍 하도리로 시집을 간다. 해금은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미야케지마에는 구월의 시누이인 임례가 먼저 터를 잡았고, 구월과 해금, 기영도 옮겨와 함께 살았다. 미야케지마 아코라는 곳은 해금이 결혼하여 살던 지역이다. 화산섬 미야케지마의 주요 화산인 오야마산은 1962년, 1983년 폭발이 있었고, 2000년 화산 분출 후 주민 대피령이 실시되었다가 2005년에 대피령이 해제되었다. 도쿄는 기영이 공부하던 곳이었고, 오사카는 임례의 막내딸이 시집가 임례 가족이 이주하게 된 도시다. 와다우라에는 많은 해녀들이 정착했던 곳인데, 구월과 해금이 전쟁시절 잠시 살았던 지역이다.

출가물질이라는 것이 있다. 제주를 떠나 육지나 동북아로 나가 물질을 하는 것이다.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출가물질을 나간다.  <검은 모래>에서는 일본 바다로 나가고, 그곳에 정착했다.


검은 모래의 배경이 된 지역들

해금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구월의 이야기, 켄의 이야기였다가 미유의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의 시간엔 근원이 비슷한 상처가 흘렀다. 해금의 고향은 제주이지만, 해금의 아들 켄의 고향은 미야케지마이다. 제주와 미야케지마는 화산섬이었고 해금은 두 곳 모두에서 여전히 물질을 했지만 절대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결국 당신의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고, 아들은 제 고향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P276 제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옛이야기들은 추억이 되어 섬의 곳곳에 숨어 있었다. 고향이라는 곳이 달리 고향이겠는가. 분화와 화산재로 타버렸거나 말라죽었지만, 오래전에는 후박나무 숲이 참으로 볼만했다. (중략) 아내와 딸에게는 섬의 모든 해안과 절벽이 검은 것하며 해수욕장까지 백사장이 아니고 검은 모래라는 점이 신기했다. 고만고만한 검은 돌들을 주워와서는 좋아라 했다. 켄은 검은 돌들을 보다가 뜬금없이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검멀레. 어머니가 켄을 건일이라 부르던 시절, 검은 모래를 어머니의 고향에서는 검멀레라고 한다고 알려주었다. 부질없는 기억들이 자꾸 떠올라 켄을 괴롭혔다. 섬은 낡아빠진 것들을 너무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화산에도 지진에도 태풍에도 끄떡없이 남아서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얼른 섬을 떠나고 싶었다.
P320-1 “할머니, 참 곱다. 얼른 기운 차리세요. 그래야 제주도에 가죠.” “이제는 괜찮다. 안 가도. 내 고향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그대로 다 있어. 새삼스럽게 새 기억을 만들 필요가 뭐 있겠지. 예전 기억으로 충분해.” (중략) “그런데 말이다. 이 할미가 글쎄 여행 중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지 뭐냐.” “여행 중이라뇨?” 미유는 겁이 났다. 뇌로 번진 암이 할머니의 기억회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너무 아프다. 글이, 해금이, 그 삶들이, 그 시대가 너무 아프다.


제주 4.3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고 시작했던 제주 근대사 소설은 그 시절을 살던 또 다른 해녀(잠녀)와 그들 가족의 다른 아픔을 들추어냈다. 어떤 사건 하나만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파헤칠수록 덩이 덩이 이끌려 나온다. 제주 4.3이 1948년 4월 3일 단 한 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로부터 몇 년의, 그리고 그 몇 년으로 인해 발생한 수십 년의 고통이듯 이들의 신산함도 한 시점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다. 한 사람의, 한 세대의 인생은 다른 이들의 삶과 이어져 있고, 한 사건의 파장은 바다처럼 멀리 퍼진다.


P231-2 모두가 험하게 떠났다. 박상지는 원폭으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고, 구월은 바다에서 넋을 빼앗겼으며, 한태주마저 한국전쟁으로 귀한 목숨을 소각해 버렸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해금의 주변에는 가난하고 슬픈 삶과 처절한 죽음이 너무도 흔했다. 시대가 그랬고 전쟁이 그랬고 인생이 그랬다. 쇠털같이 많은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마냥 풀풀 날아서 고단한 육신 내려 앉힌 곳. 그곳은 곧 삶의 터전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고통까지도. 고국산천을 떠나온 사람들의 운명은 질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난이라는 저주의 대명사가 덕지덕지 붙었고, 버짐이 피고 윤기 없는 피부는 허옇게 각질이 일었으며, 발뒤꿈치는 가뭄 난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고 터졌다. 귀한 목숨 천한 목숨이 따로 없는데, 어이없이 죽어버린 목숨이 숱했다.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정든 땅을 떠나온 사람이나, 징용이다 징병이다 끌려온 사람이나 삶의 방식에 큰 차이는 없었다. 결국은 이국땅에 육신을 묻고 고혼이 되어 다시 풀풀 날아갔다.


마무리: 육지것


제주에 이사 온 지 10년 된 아이 친구 엄마 말씀이, 아직도 제주도 어른들은 자신에게 ‘육지것’이라고 하신단다. 한 삼대쯤 살아야 비로소 그 꼬리표를 뗄 수 있다며 웃으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주소지 이전 후 난 이제 제주도민이라며 뿌듯해하던 것이 좀 머쓱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제주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통분모라고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정도. 육지것들의 '우리'에는 애당초 제주가 빠진 적이 없다. 겨우 겨울 한 달, 봄 한 철밖에 나지 않은 육지것인 나도 제주의 매력에 폭 빠지고 나니 제주를 더 알고 싶고, 내 인생에 포함시키고 싶고, 제주에 온전히 담기고 싶어 진다.


P198 이리하여 공식 커플이 된 미유와 지로는 따가운 눈총을 여기저기 맞으며 비교적 수월하게 첫 단추를 채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 서로를 포함시키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다. 둘 사이에 교집합을 얼마나 만들어가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사람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탐색하면서 시작된다. 일단 공통분모가 만들어지면 그 만남에 걸맞는 관계의 성질이 부여된다. 동료가 되거나 선후배가 되고, 또 친구가 될 것인지 애인이 될 것인지 나아가 부부가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제주에서의 하루하루가 아쉽고 귀하다.




출가해녀의 노래(제주빌레앙상블 2022. 7. 8.)

https://www.youtube.com/watch?v=HpNbL0BDbfQ


출가해녀의 노래(제주빌레앙상블 2024. 5. 28.)

https://youtu.be/dxFoHNNKSls?si=sS3oBlM1RqOG2ZGT


P324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생활은 도시 생활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너무 많다. 공간은 자유조차 구속한다. 섬에서의 시간은 제한된 공간보다 더 사람을 숨 막히게 할 때도 있다. 유배지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섬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미유가 만난 섬사람들은 바다를 닮았다. 그들은 담아가면서 사는 삶보다는 덜어내면서 사는 삶에 익숙하다. 중요하고 귀한 것을 많이 가지지 않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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