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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 너머 Oct 25. 2024

10년 차 독서지기들이 "해녀들의 섬"에 방문하다

#리사 시 #해녀들의 삶 #제주4.3 #일제강점기의 제주 #작별하지않는다

10년을 함께 읽었다니: 책모임 의학림


2015년, 둘째를 출산한 해다. 책모임 의학림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성격은 어딜 간다고 달라지지 않나 보다. MBA(경영학 석사) 동기들과 경영학과 관련된 책들을 함께 읽어보자고 시작했던 모임이 벌써 10년 차가 되었다. 2019년도 휴지회원으로 1년 쉬었던 것을 빼면, 나는 이 모임에서 9년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함께 책을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초창기엔 경영/경제 도서 카테고리의 책들을 주로 읽다가 해가 거듭되며 그 너머의 책으로 확장되었다. 멤버들이 돌아가며 추천하는 방식 덕에 혼자서는 고르지 않았을 책들도 두루두루 읽을 수 있었다. 책 추천, 이게 뭐라고... 연초 책 추천 순서 사다리 타기를 할 때면 마음이 쫄깃쫄깃하다. 모두가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을 고르는 마음의 무게는 의외로 상당하다. 추천자는 책뿐만 아니라 그 달의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제안'할 수 있다.


제주에 살러오며 책모임을 제주에서 해도 되냐고 슬쩍 물었다. 서울, 경기, 그리고 천안에 집을 둔 멤버들은 일단 오케이! 추천자의 모임참석이 필수인만큼 정 안되면 온라인으로 하자 생각하며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려 3개월 전부터 말이다. 


의학림의 독서노트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미리 추천자는 다음과 같은 양식에 따라 저자 소개글을 올린다: 1) 내가 추천하는 이 책과의 인연은?; 2) 저자/역자는 어떤 사람인가?; 3) 의학림 멤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이유는?; 4) 오프모임의 장소, 날짜, 시간. 그리고 모든 멤버는 모임 하루 전날 자정 전까지 독서노트를 인터넷 카페에 올린다. 독서노트는 각자의 개성이 허용되지만, 대략 "1) 책을 읽기 전; 2) 이 책의 핵심 한 줄(일명, 마음 콕); 3) 독서노트(책 구절과 생각); 4) 이 책을 내 삶에 적용하면"의 영역으로 나누어 작성한다. 독서노트 업로드를 늦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 1년에 번씩 일명 회장을 뽑는데 10년 차쯤 되니 모두 번 정도는 일을 맡아보아 이제는 약간 당번 같은 느낌으로 회장을 맡아 회비 관리와 벌금관리를 한다.  


10년 지기들이 제주로 온다, 제주의 책을 들고. 


의학림, 2024년 6월의 책, 해녀들의 섬


해녀들의 섬: Lisa See


이걸 고를까, 저걸 고를까 고민하는 일이 행복한 것은 오직 책을 고를 때뿐인 것 같다. 


함께 읽을 책을 고르는 기준은 제주의 아픈 역사와 해녀 이야기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 너무 학술적이거나  너무 길지 않은 책으로(우리는 이미 예전에 두 권짜리 돈키호테에서 대거 벌금자가 발생하지 않았던가)! 

제주도의 많은 도서관에서는 도서관 한 켠에 제주에 대한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그러다 외국인이 쓴 해녀와 4.3 사건을 함께 다룬 소설을 발견했다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인 리사 시(Lisa See! 바다를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성을 가진 작가). 이전작들이 주로 중국계 미국인(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관련 사회활동도 많이 한 데다가, 실제로 작가 스스로가 1/8은 중국인(증조부가 중국인)이라는 작가  소개글을 보며 은연중에 동양인 같은 외모를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 그냥 서양인이다 


다들 어떻게 읽고 있을까? 


책의 두께가 상당하지만 그래도 소설이니 바람 가득한 섬 어딘가 카페에서 쉬엄쉬엄 읽어야지 했던 최초 마음과 달리 나는 결국 집 책상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읽으며 겨우 겨우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온 나라의 상처였던 일제강점기부터 국지적으로 멍들고 피 흘렸던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책에서 다뤄지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영숙과 미자의 전 생애를 덮쳤다. 소설은 마치 영화처럼 2008년 영숙의 어느 날과 과거의 많은 날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영숙과 미자는 서로 함께, 혹은 서로의 손을 놓은 채 어둑한 시대의, 인생의 바다를 경험한다. 물속에서 숨을 삼키는 법을 배우고 어머니가 있었던, 그리고 어머니의 위패를 안치한 사당에 귤을 놓아야 했던 1938년의 시간을 지나 해외 출가물질과 혼례, 출산으로 어른이 되어갔던 1944년~1946년의 시절, 슬픔과 두려움, 불행과 좌절이라는 단어로 단순화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1947~1949년의 상실의 시대, 원망과 분노로 가득 채운 1960년대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은 더 가혹하다. "나의 분노에 의해 벌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또한 "매일 그 분노를 안고 살"아야 했던 시간. 마치 해녀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진 듯 바다를 도피처 삼아 차가운 껍질 안에 꽁꽁 싸놓은 묵은 감정들을 바다에 들어설 때나 되어야 펼쳐낼 수밖에 없는 그 긴 시간을 건너 2008년이 되어서야 그 마음의 껍질이 쩍 갈라진다.     



해녀들의 섬, 제주는 어디 하나 생채기가 없는 곳이 없었다. 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저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고했다' '고생 많았다' 토닥여주고 싶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동안 몰라주어 미안했다' 다독여주고 싶은. 

P258 “만약 저게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그건 훨씬 더 바보 같은 소리예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제주 사람들은 과거에 사는 것 같지, 현재에 사는 것 같진 않다는 얘기죠. 그리고 분명히 미래에 살지도 않죠.”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바를 영숙은 어떻게 열다섯 살짜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가 바로 현재다. 현재가 바로 미래다. 
p374 우리 섬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섬입니다.
P392 제주가 다시 귀양 온 사람들의 섬으로 변하고 우리 모두가 방황하는 넋이 된 것 같았다.


제주의 해녀들은 제주와 닮아 있었다. 거친 바람 속 테왁 하나에 숨을 기대는 해녀들의 강인함 속에 숨겨진 속살을, 상처를 무심코 헤집어 들여다본 느낌이다. 과거와 현재의 세대가 사람을 통해 길게 이어진 흔적에 마음이 막막하고 먹먹하다.

P345 뭍에서는 어머니가 되지만 바다에서는 슬퍼하는 과부가 될 수 있다. 지구 전역에서 큰 파도로 밀려오는 소금 눈물의 바다에 네 눈물이 보태질 것이다. 
P436 “바다에 들어가는 모든 여자는 등에 관을 짊어지고 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도, 바닷속 세상에서도 우리는 힘든 삶의 짐을 끌고 다닙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해녀들의 섬>이 용서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또한 "용서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4.3 사건이 완전히 이해되어 충분히 애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가해자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질 때까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주를 가로지르는 도로 속에서 제주에서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표지판을 우연히 마주치거나, 흰 국화가 놓여있는 4.3과 관련된 현장을 길을 걷다 마주할 때면, 이것이 그저 용서로 과연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든다. '용서'라는 말이 그렇게도 넓은 포용의 용어인지 의문이 든다. 그저 잊지 않겠다는 다짐, 이런 사건이 다른 얼굴로 우리 사회에 다시 찾아오는 일을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가슴에 넣어둔다. 이것밖에 못해 조금은 한심스럽다.

P450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
p504 그러나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기리는 한 방법으로 내 분노와 원한을 고수해야만 했다.



함께 읽고 나누기, 마음에 담아 머무르기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지도 몇 달 되었고, 함께 읽은 것을 나눈 모임도 한참 지났다. 아직 제주에 있어서 그런지 책을 읽을 때의, 이야기 나눌 때의 여운이 문득문득 밀려온다. 제주의 다른 책모임에서 나는 또 한 번 이 책을 추천했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4.3에 대한, 또는 해녀의 삶에 대한 소설은 생각보다 많다. 어떤 글은 마음이 서늘해지고, 어떤 이야기는 적나라하다. 책 한 권을 읽어낼 때마다 마음이 고단하다. 꾹꾹 눌러낸 불분명하고 아득한 슬픔을 전력을 다해 다시 검은 돌을 쌓아 눌러놓는 형색이다. 


이 책은 번역서다. 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을 번역했고, 그 과정에서 제주어의 일부는 남았지만, 많은 부분은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썼기 때문에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책 추천에 이 책을 읽어보았다는 또 한 분은 책을 읽는 내내 제주어가 아니라 어색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동의한다. 아직은 약간 겁이 나서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몇몇 다른 책들보다 이 책의 글은 건조하다. 정부와 미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가해에 대한 무게추가 어느 쪽에 유리하게 실려있는지, 읽고 나니 약간 헷갈리기도 하다. 정치를 논해야 하는지 인간다움을 상기해야 하는지, 사회적 관점이 중요한지 개인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읽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앞으로는 다른 책을 추천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제주에서 육지까지의 바다보다 더 큰 바다 너머에 있는 이방인이 4.3에 대한 책장을 펴놓고 읽어보라는 것 같아 여전히 인상적이다. 어쨌든 다시, 다른 목소리의 책들에 한 권씩 도전해야겠다. 



덧붙이기: 마음의 실루엣


책모임 할 장소를 찾다 또 한 번 제주의 보석 같은 곳을 찾았다. 제주에 많은 책방과 북카페들이 있지만, 아시다시피 제주의 멋진 곳들은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미리 점찍어둔 표선의 '북살롱 이마고'는 재정비 휴무... (오, 내가 갔던 5월의 그날은 행운이었어!) 꼭 한번 가고 싶었던 '해녀의 부엌'은 예약 가능한 식사 시간에 멤버들이 모두 오기가 어려울 듯하고, 저녁 시간 어찌어찌 맞춰 갈 수 있을 것 같은 또 어떤 곳은 곳도 마침 그날이 쉬는 요일. 결국 공항에서 가까운 곳으로 모임 장소를 넓혀보자 하고 찾게 된 곳이 바로 "마음의 실루엣".


책모임을 굳이 '제주'까지 와서 하겠다고 육지에서 비행기 타고 오신 손님들께 진짜 멋진 공간을 소개할 수 있어(나도 그날 처음 간 것이지만) 정말 기쁘다. 다음 언젠가 사색과 담화의 장소를 표방하는 이곳에 홀로 머물게 된다면 좀 더 마음의 실루엣의 한 자락을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실루엣"의 책장


* 관련 글타래

https://brunch.co.kr/@dreamsupporter/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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