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니라 머물러 보기 #마음가짐이 중요해
나는 이미 이번 봄에 녹차를 마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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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아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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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진짜 제주로 가자는 책이 등장했다!
이번 책은 호지차라떼를 마시며 읽기로 했다.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
너무 아침부터 서둘렀나 보다. 표선에서 중산간으로 들어서는 지점에 위치한 "오늘은 녹차 한잔"이 이제 막 문을 열었다. 문을 막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분주히 하시길래 먼저 녹차밭 산책부터 한 후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녹차밭을 끼고 비포장길을 걸으니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한라산의 꼭대기에 구름이 걸쳐지지 않은 맑은 날. 오, 이런 맑음은 최근 들어 오랜만인 듯하다.
아무도 없는 녹차밭 사잇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표선에서 바라보면 한라산이 참 멀리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차를 타고 가는 곳곳에 한라산은 어느 순간 우뚝 앞서 있곤 한다. 육지에서야 높은 산, 야트막한 산, 산 천지라 이런 느낌이 덜한 것 같은데, 지평선에 올록볼록 솟아오른 360개가 넘는다는 제주의 오름들을 압도하는 한라산은 확실히 다르다.
찻잎의 초록은 맑은 날 보니 더 싱그럽다. 가까이서 보면 비죽이 올라와 키가 큰 녀석도 있고 옆으로 슬쩍 삐져나온 녀석도 있지만, 멀리 초점을 두고 보면 잘 정돈된 화단 같다. 계란 노른자 같은 수술을 가진 녹차꽃도 푸른 잎 틈새마다 살짝이 보인다. 이 꽃이 지고 열매는 내년에 맺힌다니(그래서 차나무는 1년 전의 꽃이 맺은 열매와 지금의 꽃을 함께 볼 수 있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 불린다고 한다), 독특한 생육방식을 가진 식물이다.
녹차밭을 따라가다 보면 "비밀 동굴"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녹차밭 사이로 난 굽이진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온다. 녹차밭 아래에 이런 곳이 숨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햇살이 닿지 않는 동굴 깊은 곳은 휴대폰 손전등으로 비추어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동굴의 천장은 내가 방금 디뎠던 녹차밭의 아래다. 땅속의 속살을 들춰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동굴을 구성하는 바위 사이사이 짙은 푸르름이 거뭇거뭇 보인다.
똑똑 물이 천장에서 떨어진다.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아 입구에 쪼그려 앉아 "아아!" 동굴을 향해 괜히 소리를 내본다. 간간이 새소리만 지저귀는 고요한 오전 시간. 가만히 공간을 음미하며 눈을 감으니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느낌이다. 이곳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간일까?
제주에 살러 오니 이런 곳에 눈이 더 오래간다. 3박 4일 여행을 왔더라면 굳이 일부러 이곳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1년 '살이'자의 여행은 제주의 흙, 나무, 하늘, 구름을 좀 더 가까이, 여유로운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여행지로 많이 오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가짐은 일상의 많은 것들을 의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나의 이다음 여행은 그곳의 일상을 더 담뿍 담을 수 있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제주 여행자들에게 그런 길잡이를 해주는 책이었다.
진짜 제주, 가짜 제주가 어디 있나? 그래도 왜 '진짜'를 언급했는지 알만도 하다. 여행을 많다면 많이 다녀봤음에도 나 스스로 '프로여행러'라는 이름을 붙이기 좀 뭐 한 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다닌 여행들이 정말 '진짜' 여행이었나 속으로 의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旅行)은 '거주하는 곳을 떠나 다른 곳을 다니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그 함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의 어원에 '고난', '수고'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인생을 여행으로 비유하는 말에서는 그저 몸의 물리적 이동만을 뜻하는 것 같지 않다. 낯섦, 설렘, 이런 감정들이 꼭 여행과 묶이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여행'만큼 주관적인 단어도 없는 듯하다. 도무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여행'으로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뜬금없게도, 갑자기 미국 입국 심사가 생각난다. 나는 아직 관광과 컨퍼런스 참석 둘 외의 입국 목적을 대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나는 여행 왔소."라고 선문답처럼 답하면 그들은 나를 그들의 나라로 들여보내줄까? 그러고 보니 선문답스러운 '여행'이라는 영어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for tourism; for sightseeing; visit as a tourist; visit famous landmarks... 모두 살짝 가벼운 '관광' 느낌이 든다!)
삼천포로 살짝 샜지만, 아무튼 '여행'도 제대로 감을 못 잡은 내게 '진짜 여행'이 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다소 난감해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은 그동안 우리가 슬쩍 발 담그고 간 제주 여행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지인과 함께하는(듣는)(걷는)(생각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마을 삼촌(삼춘)들과 함께 걷고 상상하며 알게 된 제주"를 소개한다. 평대리, 수산리와 수산리, 우도와 가파도, 김녕마을, 모슬포와 원도심, 그리고 저자의 제주 마을까지. 7개의 챕터로 나누어 소개하는 제주 마을들은 여행지를 거니는 한 사람의 혼잣말이 아니라, 삼춘들과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p48 삼춘의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평대 바다는 이전의 평대 바다가 아니다. 그리고 그건 평대 바다뿐이 아니겠지. 제주 바다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우도와 가파도의 삼춘들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p124 강윤희 삼춘은 "아침에 해가 뜨고 수평선으로 고깃배가 하나 딱 들어오는" 고요한 풍경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섬의 서쪽에 갔는데 "저어기 바다 건너에 본섬이 보이고, 날씨에 따라 능선이 바뀌며 한라산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게 너무 신기했었다"고 한다. (중략) 우도 안에서도 전혀 다른 풍경을 보며 자란 두 마을의 어린이는 조금 다른 꿈을 꾸지 않았을까.
p156 마을을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과거를 아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표선에서 성산 가는 길을 오가다 보면 제2공항 신설로 이런저런 현수막들이 붙어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부분도 있다.
p95-7 활주로의 북쪽 -오창현, 김일영(성산읍 수산리민)
나는 오래된 마을의 심장입니다/ 아이들의 노래와 웃음소리/ 골목들로 퍼져나가면/ 마을에는 봄이 오고/ 꽃들이 피었습니다//
(중략)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노랫소리를 지우고/ 웃음소리를 지우고/ 아이들마저 하나 둘 지워갈 때/ 마을의 심장은 멈추고/ 아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나는 성산읍 수산초등학교입니다/ 활주로의 북쪽입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을 길러 낸/ 오래된 마을의 심장입니다/ 부디 저와 저희 마을을 지켜주세요/ 정직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 여름에는 보리 베보/ 가을에는 무 심고/ 겨울에는 밀감 따며/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제주에서 마주했던 4.3 사건에 대해 나도 들었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만 하는 생각은 아니구나, 안도하기도 했다.
p176 제주에 사는 일은 매일 푸른 바다를 만나고, 장엄한 한라산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끝없이 4.3 사건을 비롯한 근현대사를 마주하는 일이다.
p177 제주 도민들에게 4.3 사건은 내가 겪은 일이거나 나의 할아버지가, 나의 어머니가, 나의 친애하는 괸당이 겪은 일이다. 삼춘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 현장에 가보더라도, 그 상처와 슬픔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려웠다. 내가 이 이야기를 전해도 될까. 이방인의 시선으로 섣부른 감상을 전하게 되지는 않을까.
나도 제주에서 이런 여행을 꿈꿨는데...... 아직 늦지 않았겠지?
에필로그: 여행으로 시작해 삶으로 끝나는 길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의 에필로그 제목은 "여행에서 시작해 삶으로 끝나는 길"이다. "낯설었던 거리가 마치 오래 살던 동네처럼 익숙해질 때, 단골 식당이 생기고 인사하는 동네 사람이 생기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알아볼 때, 나도 모르게 숙소를 집이라고 말할 때 여행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p214)"고 말한 이 부분! 그래, 나는 이 부분 때문에 '진짜 여행'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올해 초 제주 이곳으로 삶을 슬쩍 옮겨두었다. 반쯤은 현지인으로(아마도 학부모의 정체성이 가장 크게 부여된), 반쯤은 여행객으로 지난 몇 달을 산 것 같다. 겨울이 막 봄으로 바뀌는 계절에 터전을 잡고, 이제 가을이 겨울로 변해가려 한다. 그리고 곧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올해가 내 삶의 '새로운 국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삶과 여행이 모호해지는 그 경계에서 나는 나의 이 1년살이가 사실은 '진짜 여행',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여행의 새로운 국면을 맛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삶이 너무 행복하고 편안했던 것은 일상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여행이 예전의 여행과 보는 것, 느끼는 것이 달랐던 것은 이 여행이 곧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삶과 여행을 가로지을 수 있는 금을 그을 수 있는 막대기 따위는 없었다. 나는 지금 건너고 있는 이 1년의 시간을 삶의 관점이든 여행의 관점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충분히 잘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쪼록 이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이 끝까지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 한 페이지가 행복한 내 책의 한 페이기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