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목장 #카페 물썹 #어린왕자
바람이 분다.
제주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밖에 나서서 직접 맞닥뜨리지 않는 한 제주의 거친 바람결을 안에서는 쉬이 알기 어렵다.
그래도 바람은 분다.
아무리 파고가 높은 날일지라도 서핑이 흔한 호주나 미국의 어느 바닷가보다 파도결은 심심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다의 바람이 육지에 머무를 때엔 제주가 더 강렬하다.
제주의 바람은 겪어보기 전에 속단할 것이 못된다.
여느 날처럼 바람 부는 어느 날, 신풍목장과 제주의 동쪽 해변이 맞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 물썹*에 앉아있다.
내가 가본 바다뷰 카페 중에 나는 이곳이 으뜸이다.
바다와 목장이 함께 있어 마음이 더 트이는 느낌이다.
3월엔 소가 있었는데 이날은 아무도 없다.
해안길 따라 올레길 순례자만 있을 뿐이다.
3월과 10월... 달라진 것은 하늘 색깔과 풀 색깔, 같은 것은 바람 색깔.
* "물썹"은 제주어로 바닷가, 해변을 뜻하는 말이란다. 아쉽게도 제주어사전에서 찾지는 못하였다(https://www.jeju.go.kr/culture/index.htm).
오늘은 표선도서관서 빌려온 어린 왕자 시리즈를 읽기로 했다.
경상도 사투리(애린 왕자), 전라도 사투리(에린 왕자), 그리고 제주어로 쓴 어린 왕자(두린 왕자).
시리즈라고 표현했지만, 제주 어린 왕자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 어린 왕자와는 다른 출판사에서 만들어졌다.
스스로를 나름 전국구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사투리라면 일가견이 있을 거란 자신감을 갖고 첫 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게 웬걸.
단숨에 덮고 말았다.
아, 이런.
카페가 아니라 집이었다면 경상도, 전라도 버전은 억양 살려 읽어가며 뜻을 헤아려봤겠지만, 이곳은 우아한 신풍목장 앞 아니던가.
심지어 제주어는... 그동안 나름 기본에 충실하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음에도(Youtube를 많이 봤다고 생각했음에도) 외국어 저리 가라 싶었다.
결국 함께 빌린 표준어 번역판 어린 왕자와 제주어 두린 왕자를 비교해 가며 더듬더듬 읽어야 했다.
어디 한 번 느껴보시라! (표준어 답안지는 글의 마지막 참조)
"호루는 나가 해지는 걸 마흔 세 처리나 봐시녜."
호꼼 시난 두린 왕자가 덧돌앗다.
"경허지 아녀?.. 막 슬플 때민 해 지는 걸 보구정허네."
"마흔 세 처리나 본 그 날은 아주 아주 슬퍼난 거라?"
헌디 두린 왕자는 답허지 아니허엿다.
어른이 되어 이 책을 다시 보니 어른인 "나"의 눈으로 "어린 왕자"를 다시 보게 된다.
날카로운 "나"의 질문에도 묵묵히 태양이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어린 왕자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왜 눈물이 나냐......
"수백만 개 벨에다 또 수백만 개나 뒈는 벨 가운디 단 호나만신 꼿을 좋아허여. 그 사름은 그 꼿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제완 허겟주. 그이는 저기신디 골을 거라. '나 꼿은 저디 어딘가에 잇어..' 허주만 양이 먹는덴 허민, 건 그 사름신디는 모든 벨이 혼 순간에 자취를 곱지는 거영 곹을 거라.. 경헌디 이게 중요허지 안허다고?"
비행기 수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나"에게 어린 왕자가 계속 말을 건다.
아저씨도 어른들처럼 말한다며 타박도 하면서.
나도 어른이지만, 마음은 어른이 아니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린 왕자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내 숨겨둔 마음의 끄트머리를 잡아채어 밖으로 기어코 끄집어낸다.
"아니, 난 벗을 촞암서." 두린 왕자가 골앗다.
"질들여진덴 헌 게 무슨 뜻?"
"그건 하영덜 잊어분 말인디. 관계를 몾인덴 헌 뜻이여."
"관계를 몾인다?"
"어, 게." 여히가 골앗다.
"는 나헌티 다믄 두린 아이일 뿐이주. 달른 수많은 아이들처름 말이여. 경핸 난 느가 필료허지 안허고 느도 나가 필료허지 안허여. 너신디 난 달른 수많은 여히들광 곹은 혼 모리 여히에 지나지 않아. 경허주만 만약 느가 날 질들이민 그땐 우리는 서로가 필료허여지는 거라. 나신디 는 이 싀상에서 단 호나인거주. 너신디 난 이 싀상 단 호나뿐인 거곡."
(중략)
"어떵 허민 뒈는 거라?" 두린 왕자가 골앗다.
"는 촘을성이 잇어사 허매." 여히가 답허엿다.
"몬저 나신디서 멀리 털어정 앚으라. 테역밧에서처름 말이여. 나가 저 구석서 늘 젓눈질로 볼 테주. 아무 말도 허여선 아니뒈매. 말이 오해를 불르기도 허난. 허주만 매날 는 호꼼썩 가차이 앚이는 거라......"
이틀날 두린 왕자가 다시 오랏다.
"곹은 시간에 오는 게 더 낫일 건디." 여히가 골앗다.
"예를 들엉, 만일 느가 오후 네 시에 온덴 허민 난 세 시부터 지꺼질 거라. 느가 오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더욱 지꺼질 테주. 네 시가 뒈민 나는 안절부절못헐 테주. 난 행복의 값어치를 알게 뒈는 거라. 허주만 느가 아무 때나 온덴 허민 언제 마음의 준비를 해살지 몰르네. 경허난 의식이 필료허여."
아마 <어린 왕자>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 아닐까?
오후 4시가 되면 가끔 여우가 생각나니 말이다.
하지만 더 유명한 글귀가 더 있다.
"서막이 고운 건.." 두린 왕자가 골앗다. "어딘가에 세미를 곱젼 이신 때문이라..."
"집이든, 벨이든, 서막이든, 걸 곱닥허게 허는 건 곰추언 잇어. 눈에 보이지 안허는 거라."
"곱지다": 숨기다, 감추다
"곱닥다""곱들락하다": 얼굴이나 성질이 매우 곱다
어떻게들... 다들 아는 이야기이니 이해는 좀 하셨을까 모르겠다.
이 별 다음엔 그 별 아니었어?
어, 이 내용이 있었던가?
예전에는 예사로 넘겼던 말이 다시 읽으니 다른 의미로 기억된다.
"어린 왕자"로 대표되는 몇몇 장면, 몇몇 글귀들 말고 숨어있는 장면들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사막에 불시착한 "나"의 당혹스러움, 분주함과 부끄러움, 외로움, 그리고 슬픔 같은 오만 감정들이 그 짧은 책 안에서 휘몰아친다.
책을 덮고 밖을 바라보았다.
널따란 목장이 사막으로 보인다.
시퍼런 바다가 우주로 보인다.
한참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
그리고 제주어,
읽을수록 읽을 맛이 난다.
듣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낭독본까지.
들으면 더 맛깔스럽다.
자, 제2한국어를 배울 때다.
<제줏말 곧는 어린 왕자-두린 왕자>는 유튜브채널 [제주탐구생활]에서 낭독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jfaD0gVmlJY?si=e9ObDIgDv_8TSr9K
"어느 날은 태양이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적도 있어."
조금 있다가 너는 이렇게 덧붙였다.
"있잖아, 사람은 너무 슬플 때 해 지는 걸 보고 싶거든......"
"태양이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날 그렇게 슬펐던 거야?"
어린 왕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 수백만 개의 별 가운데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한다고 해봐. 그는 별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겠지. '내 꽃이 저기 어딘 있어.' 양이 꽃을 먹어버리면 그는 모든 별들이 일순간 자취를 감춰버린 느낌을 받겠지.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사람들은 거의 잊어버린 말이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답했다.
"관계를 맺어?"
"그래! 넌 지금은 많고 많은 남자아이 중 하나일 뿐이지.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너도 내가 필요하지 않지. 너에게 난 많고 많은 여우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린 서로 필요해진단다. 넌 내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나도 네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여우가 되고."
(중략)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인내심이 필요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저쪽 풀밭에 앉으렴. 내가 살짝 곁눈질로 널 바라볼 거야. 넌 아무 얘기도 하지마. 언어는 오해를 낳거든. 그래도 날마다 내게 조금씩 더 가까이 와서 앉아."
다음 날 어린 왕자가 여우를 보러 다시 왔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여우가 말했다.
"예를 들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설렐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가 되면 난 가슴이 두근거려서 안절부절못하고 걱정을 할 거야. 행복의 대가를 알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잖아. 넌 의식을 지켜야 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 집이든 별이든 사막이든 그걸 아름답게 만드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