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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큐레이터 에드가 Jan 18. 2023

왜 쟁이의 융단폭격

아이들에 생각은 자주 팽창하고는 한다. 어른이 될수록 팽창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폭이 줄어든다. 왜 그럴까? 

 

어린아이는 수시로 입에 '왜'를 달고 다닌다. 모든 게 신기하고 의문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처음 왜를 입에 달기 시작했을 때 어른들은 성심 성의껏 대답을 해준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 도우언하여, 그러니까 그건 말이야라고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그러다 '왜'의 융단 폭격이  시작되면, 어른은 혼비백산. 나의 친자식일지라도,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백기를 들이 만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 누구나 왜 쟁이었다. 왜를 남발하는 그런 왜 쟁이. 왜의 침략을 받은 부모님은 두 손 두 발을 들어 백기로 투항한다. 백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엄마한테 물어봐'

'선생님한테 물어봐'

'책에서 찾아봐'

이런 과정을 몇 번 겪게 되면 아이의 우주는 팽창하기를 주저한다. 


나는 '왜' 대한 참신성에 대해 지인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눈을 구기며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말이지! 융단 폭격을 맞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야라고 했다. 자기도 아기 키워보지 않았으면서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러니까 좀 더 설득력 있는 비유로 바꿔봐 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왜?라고 외쳤다. 나는 후천적 '왜'쟁이다. 우연히 철학 책을 접하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왜를 던지기 시작하다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왜'와 창의성에 대한 밀접한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창의적이라 함은 갑자기 어느 한순간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왜' 집어 들고 창조와 파괴로 그물망을 만들어야 만한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그물망에 무언가 반짝이며 걸리게 된다. 지금 쓰고 있는 '왜'쟁이 글처럼 말이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외친 뉴턴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자꾸 틀에 박힌 생각을 하게 되면 나무 위에 떨어진 사과를 보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된다.

사과는 사과요. 사과는 맛있고, 맛있으면 바나나 그다음은? 이 정도까지가 최선일 듯. 

 

'왜'쟁이도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왜'라고 의문을 가져보는 습관은  사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주의는 필요하다.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을 하다 보면 상대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 어린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일이 생긴 거예요? 라든지, 힘드셨겠어요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라든지 여러 방식으로 왜를 회유해서 사용해야 한다.


'왜'는 비난받아서 안 된다.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말이다. 왜를 가볍게 비난을 통해 짓누르는 경향을 자주 봤다. 특히 학교나 연구실 기업 등에서 말이다. 짓눌러 벌이면, 왜 쟁이는 더 이상 생존하기가 어렵다. 


왜냐고? 왜 쟁이에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틀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상대의 표정만 예의 주시 하게 된다. 어떤 생각이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입을 꿈쩍하지 않게 된다. 한국 대학 강의실에서 유독 손을 들고 '교수님 그건 왜 그런 거죠?'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 이유다. 

 

'왜'가 무럭무럭 자라나기 위해서는 불특정 한 대상에게 무엇이던 남발을 해볼 필요가 있다. 언어 파괴술. 

나이 불문하고 왜를 활용하여, 주변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침략해 보기를. 그렇게 던졌던 '왜'가 시가 되기도 에세이가 되기도 심지어 명예와 부를 쌓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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