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의견이 일치한다는건
우리는 왜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의견 불일치 때문이다. 타인과 내가 의견이 완벽히 일치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이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의견은 매번 불일치한다. 조금에 의견 차이도 없이 의견이 100% 일치하는 일은 흔치 않다. 가끔 누군가와 100% 의견이 일치할 때 기쁜 나머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손을 맞대고 싶을 만큼의 의견 일치는 흔치 않다는 방증이다. 혹여나 내 생각에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매번 의견이 일치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누군가는 당신에게 줄곧 양보를 하는 것이다.
어제 출근길이었다. 지하철 출구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급한 일이 있어 보였다. 분명했다. 마스크로 그의 얼굴 반이 가려지고, 안경으로 그의 눈까지 가려져서. 사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으레 짐작했을 때 몹시 화남이 느껴졌다. 그는 다급하게 장애인용 출구 벨을 눌러댄다.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장애인용 출구로 나가려는 건.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갔을 때,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가기위해 누른다. 아마 그는 실수로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갔나 보다.
벨을 연신 눌러댄다. "따라~ 라 라라 라~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몇 초가 지났을까 누군가 응답을 한다.
그는 다짜고짜 화를 낸다.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엄청난 샤우팅이다. 지나가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 샤우팅이었다.
"문쫌! 열어줘요"
그냥 문을 열어 달라는 게 아니었다. 문 쫌이라고 외쳤다. 쫌에 악센트를 넣어 자신의 급박한 상황을 강조하였다.
역무원은 다급한 그의 말에 곧바로 수긍하지 않았다. 역무원도 평소였으면,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줬을 텐데. 다급하고 격앙된 목소리에 그가 걱정되었나 보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는 최대한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녀의 친절에 참을 수 없었다. 상대방에 친절에 저리도 화난 사람은 처음 본다. 그의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나 보다. 주전자가 물을 끓일 때 내는 소리처럼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전에 분노는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조금 더 분노를 더 해본다.
그는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40대가 안돼 보이는 훤칠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그를 화나게 했을까? 라고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나 보다. 얼굴은 굳어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두 키 반을 올려 상대방에게 인사를 한다. 정확한 지칭이 들리지 않았지만, 뒤에님자까지 붙여가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상냥한 사람이었다.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상냥한 말투로 상대방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의 이중잣대는 나를 흠칫하게 하였다.
상대방과 다투는 건 의견 불일치다. 필요한 건 분명 '양보'이다. 이 간단한 상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나가던 아이들을 붙잡아 물어도 다 아는 상식이다.
아이들에게 "친구와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라고 묻는다면
나를 분명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외칠 것이다.
"아저씨 그것도 몰라요? 당연히 '양보'죠"
그렇다. 양보다. 양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보'는 때와 장소를 가린다.
그는 자신이 막 대해도 될 사람, 떠받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이중적인 잣대로 사람을 분류했다.
그 사람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이중적 잣대를 적용한다.
그의 이중성이 놀랍다. 아니 우리의 이중성이 놀랍다.
그는 아니. 우리는 양보를 모르는 게 아니다. 양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단지 양보를 할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게 문제이다.
필요에 의한 양보를 넘어선. 사소한 양보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