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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유니버스 Sep 11. 2023

벌초의 기억

추억 속으로의 여행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의례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중 가장 부담되는 건 단연 벌초였다.


남쪽지방에 사는 내가 멀리 먼 강원도까지 팔순의 부모님을 모시고 벌초를 가려면, 언제나 하루 전에 고향에 도착해 피곤한 몸으로 잠을 청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벌초도구들을 바리 바리 챙겨 차에 싣고 들떠진 눈으로 운전을 해나간다.

아주 예전부터 다녔던 벌초이긴 하지만, 매번 갈 때마다 부담이 되곤 하는 이유는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가야해서 더 안전하게 가야겠다는 마음이 커서 일꺼다.

차가 없는 시절에는 아주 큰 배낭을 둘러매고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했던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였었는데, 그나마 차가 생기고 나서는 왕복으로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버스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되어서 조금은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버스에는 왜 그리 사람이 많았고, 길은 왜 그리 막혔는지 가도 가도 끝없는 여정이었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버스 여행이 그다지 그리움으로 남지는 않는다. 한잔 걸치신 어른들께서 ‘어린 놈이 기특하네’ 하면서 버스 안에서 노래를 시키질 않나, 내리는 휴게소마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뭐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타야하는 그 시절의 힘겨움이 고사란히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의 기억은 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그 시절의 친구들은 대부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기본적인 행사였다.


버스에서 내려 또 다시 산길을 걸어 산중에 있는 산소를 벌초하고 나면, 서둘러 챙겨 내려와 근처 하천변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한다.

너무나 효심이 깊으신 아버지께서는 조상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족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며, 산속과 동네 곳곳을 누비며 한참 길어진 잡초들을 아주 말끔히 깍아 내리신다. 얼마나 더 올지는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흐르는 땀을 훈장삼아 벌초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효도를 넘어 가족을 걱정하는 무거운 어깨의 가장의 모습이 등 뒤에서 내비친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그때마다 항상 했던 것 같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양말을 돌리시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분께는 시간이 없다면서 박카스 한박스를 선물하고 앉지도 않으시고 매년 그렇게 아쉬워하시며 발길을 돌리신다. 어느 해부터는 찾아갈 수도 없는 친구분의 집을 보면서 한숨을 쉬쉬곤 한다. 하나 둘씩 떠나시는 그 동네를 매년 갈 때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들을 흥겹게 늘어놓으신다. 일년 중 부모님과 가장 긴 시간동안 여행하는 이벤트, 난 사실 이때가 제일 기다려진다.

평소보다 더 즐거운 모습으로 고향을 찾으시고,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더 젊어보이신다. 아들로서 부모님과 단촐하게 가는 벌초 여행이 아들과 부모님이 속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벌초 후에 먹는 아니 마음놓고 사드리는 물회나 소고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눈치보지 않고 그동안 사드리고 싶었던 음식을 드시며 행복해 하시는 얼굴을 보면,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몇년동안 직장생활로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니, 벌초를 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란 가족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던지라 어쩔 수 없이 부모님만 벌초를 가셨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없어 작은 돈이라도 부칠라치면 교통비나 생활비에 보태쓰시라며 극구 만류하셨다. 그 작은 돈이라도 보내어 마음의 짐이라도 덜까 했는데 그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벌초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가능한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이런 걸 생각하면 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하지 못했던 시간이 그 어떤 것도 보상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될 일일 수 있기에, 그 아쉬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같이할 시간을 선택한거다.

성공은 순간이지만, 아쉬움은 영원할 수 있기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아들은 부모님과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 잠시나마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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