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전켜놓기, 원격시동, 안그런척 하기
지금은 원격 시대.
모든 것을 원격에서 할 수 있는 시대다.
요즘 같은 더운 날, 그리고 집안에서도 움직이기 귀찮을 때 폰 하나면 만사 형통일세.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침부터 저녁에 잘때까지 원격 인생이다.
자 시작해 본다. 원격 인생의 일상.
아침에 기상한다.
요즘은 왜 이리 더운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땀이 흥건했다가 다시 말라 찝찝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아침부터 짜증은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 폰을 들여다 본다.
6시반이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예전에 비하면 참 늦게도 일어난다.
폰의 충전기를 빼면서 다시 침대로 쓰러진다.
폰 화면을 쓱하면서 위로 슬쩍 열어젖히고는,
네이버볼까, 블라인드볼까, 블로그볼까 망설이다가,
드디어 첫 원격에 시동을 건다.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켜기 위해 앱을 연다.
가전사 이름을 밝히긴 뭐하지만, 하여간 가전사에서 만든 앱이다.
거실 에어컨과 공청기를 '띠리링' 켜고 난 후,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거실의 공기를 손가락으로 쓱 체크한다.
(골프치기 위함이 아니라 거 공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거다.)
시원해 지고 있음을 느낀다. 음. 공기도 상쾌해~~~(글쓰기 위해 과장하고 있음)
난 화장실에 가서 면도를 하고 씻고 난 뒤, 바로 화장대로 가서 머리를 말린다.
파마할 때가 된 것 같다. 예약을 해야 하지만 비싸서 한달을 더 버텨보자고 생각하고,
향수를 가볍게 뿌리고는 머리를 말린다.
그 사이에 아내가 일어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저 멀리 있는 폰의 알람을 굳이 내가 끈다.
이제 일어나 씻으러 간 후, 나는 옷을 입고 내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걸 굳이 원격으로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한데, 커피도 원격으로 내린다고 거짓말하고 싶다. (이미 거짓말인거 예전 블로그에서 들통났다.)
아내는 뭔 아침부터 에어컨이냐며 배아프다고 끄라고 한다.
꿋꿋할 때는 또 엄청 꿋꿋하게 버티고 버텨 에어컨을 지켜내고 난 뒤, 아침 식사를 한다.
내가 제일 먼저 출근하기 때문에, 이제 커피를 텀블러에 하나 더 뽑아 넣고 출근을 한다.
그 전에 또 한번의 원격 인생, 원격 시동으로 차를 예열하고 시원하게 냉방한다.
어떨 때는 미리 내가 갈 곳을 앱에서 찾아 차에 보내놓기도 한다.
차에 가보니,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 옆으로 공간이 없을 정도로 딱 붙어 있다.
또 한번의 원격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리모컨으로 차를 주차장에서 원격으로 빼낸다.
정말 원격으로 앞으로 뒤로 빼낸다.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기능이다.)
기분 좋게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모닝스페셜을 들으며 안되는 발음으로 따라하는 척해본다. 나 혼자 있을 때니까 뭘해도 멋지다. 그러다 옆 차와 나란히 하고 있으면 조용히 한다.
들리지도 않는데, 보이지도 않는데 조용히 한다.
회사에 도착해 있다가도 난 딸이 전화와서 '아빠 나 지금 집에 가고 있는데, 너무 더워. 에어컨 좀 켜줘'라고 하면 재빨리 앱을 켜서 거실에어컨을 켜놓는다. 물론 공청기도 필수다.
집에 도착한 딸은, 고마워라는 메세지 하나 없이 집으로 입성하여 여가를 즐긴다.
그러는 동안, 퇴근한 아내는 세탁기, 건조기를 동시에 돌리고,
어제 먹은 남은 설겆이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린다.
모든 것이 동시는 아니지만 끝나는 시점이 되니 내 앱에는 '끝났어요, 가져가세요'라고 연신 메세지가 울려댄다. 아 끝냈구나. 고생했네라고 생각하고 나서는 마저 일을 마치고,
손목에 있는 애플워치앱으로 다시 차에 시동을 켠다.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켜는 건 언제나 타이밍이 최고다.
주말에는 가끔 TV로 영화를 보거나 재밌다는 드라마를 다 같이 볼 때가 있는데,
이것도 앱으로 내가 몰래 채널을 바꾸면서 장난을 친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식탁에 있는 스피커로 거실 에어컨의 풍량을 높이고,
네이버 음악에서 노래를 재생시켜 달라고 주문한 뒤 폭풍같은 식사를 마친다.
이제는 우리는 자야 할 시간, 모든 것을 동시에 꺼버리고,
내일을 기약하면서 잠이 든다.
이렇게 편한 원격인생은 내일 또 반복되지만, 지겹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