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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 Feb 17. 2019

칼과 저울의 정의

이야기와 타로 활용 자서전 쓰기 18.  11번 정의


지금까지 나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지켰지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 나는 흐린 물에 비추어 보았을 뿐 맑은 연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장자, '산목')



[글쓰기 미션] 괄호 안의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드세요.

(법)
(논리)
(정직)
(평가)
(도덕성)
(공정성)
(삶의 원칙)
(공평한 규칙)
(정의로운 생각)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제 우리는 스물두 장의 대비밀 카드 여행에서 중간 지점에 왔습니다. '중간'이라는 위치가 의미하는 것처럼 11번 정의 Justice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공평함을 강조합니다. 11은 1(하나)의 의미를 반복(Ⅱ)함으로써 '하나 됨'를 강조하고, 갈등과 양면성을 지닌 2(Ⅱ)의 변신(11=1+1)으로 2가 한 주기를 돌아온 자리입니다. 11은 2로 수렴되거나 20(=2+0)으로 확장됩니다. 이 카드들은 균형이라는 의미를 공유합니다.


11번 정의 카드는 2번 고위 여사제와 마찬가지로 지혜와 균형의 카드입니다. 고위 여사제가 상반된 힘, 흑백의 기둥 사이에서 생겨나는 통찰 및 미묘한 지혜의 균형이라면 정의의 여신은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판단하려는 공정성으로써의 지혜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비학에서 하나의 수는 앞에 나온 수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11번 정의 카드는 10번 운명의 수레바퀴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운명이 이루는 정의일까요, 정의가 이루는 운명일까요.


중국과 한국 신화에 정의를 지키는 동물이 나옵니다. 해태( 또는 해치 獬豸)입니다. 해태는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여 행위하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중국의 <이물지 異物志>에 따르면 해태는 개처럼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알아보고는 그 '옳지 못한 사람을 뿔로' 들이받는다고 해요.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해태는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신적인 짐승으로(神獸)으로도 여겼고 왕이 공평무사하게 정사를 돌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복궁 근정전 처마 마루에도 놓여' 있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해가 보낸 벼슬아치' 정의의 사자 해치 (한병호그림 정하섭 글 <해치와 괴물 사형제> 길벗어린이)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은 마트(Maat)입니다. 마트는 태양신 라의 딸로서 정의와 법, 지혜의 여신이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정의의 여신은 유스티티아 Justitia, 테미스 Themis, 아테나 Athene가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들은 공명정대함을 실현하는 힘으로 칼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타로의 정의 카드에는 아테나 여신이 등장합니다. '아테나'라는 이름은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왔다'는 'A-thene'와 '영원'이라는 'a-thenosn'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으므로 '사고력'과 관련된 '지혜'를 인격화한 것이기도 하고요.


아테나의 이름은 중요한 지식으로써의 원천인 '지혜'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영원과도 같은, 멀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지혜는 '참된 나', '나다움'과 관련 있습니다. 자신의 진실성 솔직하기, 어설픈 지식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정직하게 무지나 잘못을 인정하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고 헛된 생각을 잘라내기, 분별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잡기, 편견이나 선입견 같은 '흐린 물'이 아닌 '맑은 연못'에 비추어 보기 등, 이러한 힘들은 냉철한 사고력의 힘인 의 상징입니다.


칼이 상위의 가치와 하위의 가치 사이를 분별하며 균형 잡는 힘이라면, 저울은 왼쪽과 오른쪽에 적정량을 담아서 균형 잡는 힘을 말합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나와 너 혹은 어머니와 아내일 수도 있고요, 물질 아닌 것과 물질, 혹은 무의식과 의식일 수 있으며,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 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심장과 깃털처럼 각자 가진 가치관에서 아주 다른 무게의 중요도를 말합니다.


저울(천칭 天秤)의 무게를 균형 잡는 것은 저울 위에 올려진 것의 무게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무게 중심을 바라보는 중심에 의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 내 삶의 중심을 옮기면 균형이 잡히고는 합니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내 마음의 중심, 이를테면 욕망이나 성취욕에 의한 마음의 중심이라면 일시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진실한 삶의 측면에서는 기울어진 것이지요. 저울은 내가 삶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이며 기울어진 정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삶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면 나중에 다른 쪽으로 또 치우치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며 이것을 바로잡는 힘이 정의입니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딸’을 대표하는 아테아의 지혜의 원천은 사실 그녀의 어머니 메티스입니다. 메티스는 제우스의 첫 번째 부인인데, ‘다른 모든 신들이나 인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티스의 자식이 다음 세대를 지배할 거라는 예언을 듣고 제우스는 메티스를 통째로 삼켜버리지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임신 상태였고, 두통으로 시달리던 제우스는 헤파이토스를 시켜 청동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가르게 합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황금갑옷을 입은 아테나가 튀어나오자, 땅은 굉음을 내고 바다는 파도로 솟구칩니다. 모든 신들이 아테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고 놀랐답니다. 그리고 아테나는 인간을 위해 여러 일들을 합니다. 그녀는 전쟁과 지혜의 신이며 예술품과 영웅들의 수호신이며 문명의 신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중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기 위해 최초로 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든 신이기도 합니다. 재판은 개인적 행위에 따른 평가를 받는 시공간이며 인간이 야만성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문명의 한 방편이지요. 사랑과 욕망, 성취욕을 지나온 우리는 보다 논리적이며 도덕적인 원칙에 따른 삶, 정의로운 삶이 문명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전쟁의 신 아레스는 사랑하는 딸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딸은 포세이돈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분노한 아레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을 때려죽인다. 그리하여 포세이돈과 아레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열두 신이 언덕에 모인다. 법정이 열린 것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재판은 인간들에게 공정한 재판의 본보기’였다. 재판에서 아레스는 정당방위를 인정받는다. 이를 기념하여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 아레스의 언덕)’라 불렀다. 나중에 오레스테스도 여기에서 재판을 받는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였다. 그러자 복수의 여신 에리뉘에스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쫓기던 오레스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다. 이렇게 시작된 공정한 재판의 상징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대법원은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르고 있다. (유재원 <그리스 신화의 세계1> 현대문학 p217~236 참고)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 여신들은 운명의 샘에서 물을 떠 나무의 상처부위에 뿌린다. 그러면 상처가 낫는다. (스노리 스툴루손 지음<에다 이야기>을유문화사 p43)


마더피스 타로 카드의 정의에는 북유럽 신화의 운명의 세 여신이 나옵니다. 이들은 세계의 나무 혹은 우주의 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에 와 있습니다. 두 여신은 서 있고 한 여신은 앉아 있어요. 한 여신은 떨어지는 물줄기에 손을 대어 물이 나무의 뿌리로 떨어지게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나무가 물을 잘 받아들이는지 다른 건 필요한 게 없는지 진찰하듯 손바닥으로 느낍니다. 또 다른 여신은 흰 사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소통하고요. 가운데 앉아 있는 여신은 한 손에 크리스탈을 들고 다른 손은 지구 중심과 연결합니다. 그녀는 왜 지구의 중심과 연결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그곳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마음의 중심, 국가적 차원에서는 정부의 중심, 우주적 차원에서는 지구의 중심이지요.


지구의 중심에는 크리스털 같은 보석뿐 아니라 대부분의 황금이 있는 곳입니다. 지구가 탄생하던 무렵에 생성된 황금은 그 역사적 가치와 희귀성, 변하지 않는 찬란한 아름다움 때문에 '태양'처럼 여겼습니다. 태양을 숭배하듯 황금은 실제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돈이라는 것이 생기면서부터는 최상의 교환가치를 지닌 물질이 되지요. 지금 우리는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에 살고 있습니다. 손을 대면 다 황금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빈 미다스(마이다스 Midas)는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입니다.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 속에 살고 있지요.



우리의 정신을 흠뻑 취하게 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실레노스를 스승이자 양부로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실레노스를 농부들이 발견하고 왕에게 데리고 간다. 미다스 왕은 실레노스를 알아보고 정중히 맞으며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10일 동안 융숭히 대접하고 11일째 되는 날에 디오니소스에게 무사히 돌려보냈다. 디오니소스는 그 답례로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미다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을 대면 다 금으로 바뀌게 해 주십시오"였다. 디오니소스는 '더 좋은 선택을 하면 좋을 것을' 하고 생각했지만 그대로 소원을 들어주었다. 미다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걸어가며 그가 손을 댄 나뭇가지와 풀잎과 사과 들이 모두 황금으로 변한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그는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게 했다. 아주 맛있는 고기와 빵, 진귀한 포도주 앞에 앉은 그는 풍요를 마음껏 누리려 했으나 아무것도 누릴 수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빵을 한입 베어물 수도 포도주를 한 모금 먹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으며 아무도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 마저 황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YouTube : The Golden Touch/A Greek Folk Tale/Story of King Midas/English Stories for Kids 의 한 장면



그는 황금의 풍요 속에서도 멸망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육체의 굶주림과 영혼의 갈증으로 죽을 것 같았다. 자신이 받은 선물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이 소원을 되가져가기를 소원했다. 디오니소스는 이 소원도 들어주었다. "팩톨로스 강으로 가라. 강이 시작되는 원천으로 거슬로 올라가 그곳에 머리와 몸을 담그라." 미다스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금으로 변환시키는 그의 힘이 강물로 옮겨가서 모래가 금으로 바뀌었다. 강바닥은 사금이 깔리게 되었다.



YouTube : 'EBS 다큐프라임 1부 황금 신화의 비밀'의 한 장면. 팩톨러스 강에서 미다스 왕이 정화되고 강바닥은 사금으로 변화된다



미다스 왕은 이제 황금으로 넘쳐나는 호화스러운 생활이 아주 싫어지고, 그와 반대로 시골에서의 자연생활이 좋아집니다. 과거에 황금을 숭배했듯이 이제는 자연의 신인 판(Pan)을 숭배합니다. 그리하여 판과 아폴론의 음악 경연 대회에서 판의 편을 들었다가 당나귀 귀가 되지요.


어느 날 판은 아폴론에게 음악 경연 대회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폴론은 흔쾌히 받았다. 판은 피리(팬플룻)로, 아폴론은 리라로 음악을 하기로 하고, 심판자로는 산의 신인 트몰로스가 선정되었다. 드디어 경연 시작. 트몰로스가 더 잘 듣기 위해 귀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낸다. 판이 피리를 입에 대고 불기 시작하자, 미다스는 전원적인 곡에 감동을 받았다. 이어서 아폴론이 일어났다. 트몰로스가 아폴론을 향해 바라보자 모든 나무들도 따라서 아폴론을 향했다. 아폴론은 머리에 월계수 관을 쓰고 자줏빛 예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리라를 켜기 시작했다. 황홀한 리라의 선율에 트몰로스는 아폴론이 승리했음을 말한다. 이 판정에 모두 만족했으나 미다스만 승복하지 않았고 심판이 정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아폴론은 "이렇게 무식한 귀는 인간의 귀가 아니다"라며 당나귀 귀로 만들어버린다. (토머스 볼핀치, 김명희 옮김 <그리스 로마 신화> 하서, p60~63 참고)



미다스가 누구의 음악을 더 좋아하는 것과 심판관이 내린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미다스의 문제는 한쪽으로 지우쳐있다는 것입니다. 당나귀 귀가 된 미다스는 그 뒤에도 아폴론의 판정에 대해 억울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가해자가 자신도 억울하다고 외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나 자신도 나 스스를 속이곤 합니다. 내가 분명 잘못해놓고는 타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덮어버리려는 행위 말입니다. 그러나 정의 카드에 이르면 그런 식의 자기기만은 통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진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미션]

1.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2.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때는 언제였으며 무슨 일이었나요? 정의를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을 써보세요.

3. 법적인 문제로 힘들었던 적이 있나요? 무슨 일이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치며 해결했습니까?

3. 글쓰기와 관련하여 균형감 있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역사는 거대한 적과 맞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워 승리한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차 있다. 정의를 위한 이러한 싸움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바로 인간이다. ……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받는 보상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며 작은 승리를 기뻐하고 가슴 아픈 패배를 참아내는 과정에서 오는 고양된 느낌이다.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p11,1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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