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다의 이야기
11. 낫씽 헐쓰 - 게르다의 이야기
폴을 두 손으로 꼭 잡고 포옹하려던 순간, 게르다는 잠에서 깼다. 눈부신 빛이 게르다를 압도했다. 게르다의 두 손은 푸른 형광불빛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없다, 폴은 없다, 폴은 꿈에도 현실에도 없다, 보들보들한 여섯 살의 아들은 없다, 게르다에게 태양이었던 폴은 빛으로 흩어지고 암흑이 되어 사라졌다. 게르다는 눈을 감은채 몸을 웅크린다. 허리춤에 뭔가 갑갑한 이물감이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폴..., 폴...
아들을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게르다는 환상을 다시 부르려 애를 썼다. 부질없음을 느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환상을 소유할 수 없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이제 불가능했다. 게르다가 현실 너머의, 폴이 있는 환상 속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지 12년이 지났다. 한 알 한 알 삼켜서 쌓아 올린 환상의 세계는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보이면서, 이제는 구매자가 아닌 중간 판매자로 나서야 할 때 온몸으로 체감했다.
어제 게르다는 남은 재산으로 마지막 라이프 캡슐을 샀다. 그리고 주유소 앞에서 전달해야 할 캡슐을 골목길에서 자신의 목구멍으로 넘겨 삼켰던 것이다. 환상은 강렬했다. 그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약효가 사라진 뒤에도 게르다의 두 손에는 여전히 폴의 따스한 감촉이 남아있었다. 베이비파우더 같은 폴의 체취도 코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게르다는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며 입속에서 외친다. 죽고 싶다. 나는 죽음, 죽음을 원한다. 죽음은 왜 오지 않는가? 아이의 죽음을 취한 당신은 나의 죽음도 취하라. 달달 떨리는 입 속에서 치아가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심장도 죽음의 전차를 향해 달달 떨렸다.
게르다는 신을 원망했다. 눈을 부릅떴다. 목이 말랐다. 싸늘한 죽음의 손길이 심장을 후벼 파는 것을 느끼며 형광불빛을 노려 보았다. 폴도 '없고', 그토록 원하는 '없어짐'도 '없는', 이 없음에 대한 분노로, 게르다는 몸에 열기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뒤로 나동그라지며 뒤통수를 부딪힌다. 무언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게르다의 몸에는 두꺼운 벨트가 있었다. 두껍고 질긴 벨트가 허리에 묶여 있고, 벨트는 쇠사슬 모양의 굵은 줄이 연결되어 있는데, 2미터 정도 되는 굵은 줄의 끝은 마룻바닥의 틈 아래로 연결되어 있었다. 게르다의 분노가 충격으로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깜빡거렸다. 형광 불빛에 눈이 익숙해졌다. 낯선 공간이다. 가브리엘의 방은 아니지만 어쩐지 닮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 없어요? 탁하고 갈라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뭔가를 원하며 소리친 것은 12년 전 폴이 해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게르다는 다시 소리쳤다. 누구 있어요? 살려주세요!
치직거리는 라디오 전파음처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살려달라고? 방금 전 죽음을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게르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벽으로 칠해진 벽과 천장. 천장에는 직선의 형광등이 네 개 있어서 지나치게 환했다. 복도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었고, 문 위쪽에 야구공만 한 크기의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게르다는 스피커를 향해 소리쳤다.
가브리엘? 가브리엘이야? 내가 잘못했어. 라이프 캡슐, 내가 팔게. 팔 수 있어. 이번에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먹은 거라고. 게르다는 일어나 앉아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으나 허리에 묶인 가죽 벨트 때문에 꼼짝 할 수 없었다. 스피커가 말했다. 나는 가브리엘이 아니야. 하지만 가브리엘이라고 해 두지. 뭐 사실 가브리엘과 다를 것도 없으니까.
게르다는 허리에 묶인 벨트를 손으로 더듬었다. 10센티미터 정도로 두껍고 소가죽처럼 질겼다. 게르다는 두 손을 벨트와 허리 사이에 넣고 벌려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소가죽이 맞아. 아버지는 국경을 넘어오며 감시관들에게 잡혀 소가죽으로 맞았다고 했다. 그의 등허리에는 채찍 자국이 있었다. 족히 10센티미터는 될 듯한 채찍 자국은 두꺼운 붓으로 마구 칠한듯한 흉터로 남아 있었고, 그 흉터는 그를 평생 보호와 울타리를 갈망하는 콤플렉스를 만들었으며, 딸의 이름을 게르다라고 짓는 결과를 낳았다. 게르다의 아빠는 말했다. 네 이름은 울타리야. 게르다야, 네가 울타리야. 경계를 넘지 말고 네가 울타리가 되어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스피커가 말했다. 가브리엘은 너처럼 죽음을 원하는 불쌍한 어린양을 지켜주려고 출장 나갔어. 너에 대해선 얘기 다 들었어. 가브리엘이 입이 좀 가볍거든. 네가 생명을 얻어 태어날 때 동시에 죽음도 함께 얻었다는 것, 아들 폴이 죽은 뒤 계속해서 죽음을 달라고, 죽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것을.
게르다의 부모는 국경선 인근에서 아기를 낳았다. 오두막도 키 큰 나무도 하나 없는 곳, 울타리가 되어줄 만한 나무 하나 없는 잡초 더미들 사이에서 아기가 나왔다. 그래도 씻을 수 있는 강물이 옆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게르다의 엄마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늘 덥었던, 그들이 졸릴 때나 라디오를 들을 때나, 눈을 감는 순간에도 가슴을 덮고 있던 인디언 무늬의 담요를 풀더미에 깔고 그 위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녀는 아기가 무사히 나온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기는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탄생했다. 게르다의 아버지는 잡초더미 속을 파내고 파서 그 속에 아내를 묻고 고요히 그곳을 떠나려 했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로 국경감시대에 붙잡혀 채찍을 맞았던 것이다.
게르다가 소리쳤다. 맞아, 나는 죽음을 원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죽을 수 있게 도와줘. 스피커에서 키득거리는 비웃음이 들렸다. 뭔가 착각을 하는데, 우리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야. 우리는 고통을 주지. 고통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말이야. 이렇게 묶어 놓는 방법이 통하는 것 같은데. 살고 싶어 하다니. 역시 가브리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알아.
게르다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다가 벅벅 긁기 시작했다. 목이 가려웠다. 목 안에서 사막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게르다가 말했다. 물이라도 좀 줘. 물을 원한다면 마셔. 거기 테이블에 있어. 거기 더 좋은 것도 있어. 알아서, 힘껏 움직여봐. 불가능해. 일어날 수도 없게 꽁꽁 묶여 있는데? 그 끈은 고무줄이야. 아주 강한 신축성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해. 죽을힘을 다 하면 테이블에 손을 댈 수 있어. 몸 어딘가 부서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그럼 이만. 나는 고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
치직거리는 전파음이 사라지고 고요가 찾아왔다. 게르다가 소리쳤다. 안 돼. 가지 마. 그리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은 마르고 먼지 맛이 났다. 입안과 식도에 아니 몸안 가득 모래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