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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 Mar 14. 2020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다

이야기타자기-이야기로 타로 배우며 자서전 쓰기, 2020, 부크크

생각해보면 내게 글쓰기는 글씨 쓰기였다. 일곱 살 나는 글씨를 잘 써서 경필상을 탄 뒤 내가 잘하는 게 글씨 쓰기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나를 무시하는 선생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싶어 교과서를 필사했고 거의 꼴등이었던 내가 상위권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성적은 오르고 기분은 가라앉았다. 불안감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거의 꼴등이었기에 머리도 썩 좋지 않았기에 여차하면 다시 아래로 떨어질 거라는. 


글씨 쓰기는 불안감을 다독이는 나무 손이었으며 방심하려는 나를 묶어놓는 끈이었다. 성인이 되어 글씨를 손으로 쓴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분 단위로 쪼개어 써야 하는 24시간 속에 글씨를 쓴다는 건 신선놀음으로 보였다. 게다가 첨단 도구를 두고 손으로 글씨를 쓰는 건 석기시대에 머물겠다는 구태의연한 사고에 불과했다.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나의 속도다. 


고백하건대 나는 과거에 타로 카드를 배우러  다닌 적 있다. 큰돈(내게는)을 들여 다녔기에 말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하지는 못했다. 과연 그 끝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나는 가난했기 때문이고 또한 계속 그런 식으로 흡수만 하다가는 내 색깔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타로와 글쓰기를 접목해서 쓴 이 글의 애초 목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타로를 오컬트적으로 보며 신비화시키는 작업은 부적절하다.


타로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에 했으나 시작을 못하고 있다가 브런치라는 장소를 활용할 수 있어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 책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년여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규칙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연재한 결과물이다. 종이책에는 그림 없이 글만 정리해서 실었다.


부크크 서점 바로 가기 : http://www.bookk.co.kr/book/view/77123



머리말 ‘그때’와 ‘지금’의 ‘사이’를 탐험하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는 수천 명의 스승이 있다. 린드그렌 할머니와 마르케스 할아버지. 그 사이에 헤밍웨이와 장자가, 김승옥과 조세희와 오카다 준이, 카를 융과 로버트 존슨과 안데르센이, 샤를 페로와 이름을 남기지 않은 옛이야기 스승들이 서 있다. 스승들은 무질서하지만 나름의 이유로 연대하며 서 있다.

스승들이 서 있는 교실이자 공동묘지인 책장 앞에서 나는 자주 방황한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방황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많이 해봤기 때문이고 글 쓰는 일은 고독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나만의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한테 종종 말했다. “글 잘 못 써요.” “작가가 되는 꿈 꿔본 적 한 번도 없어요.” “글쓰기 관련 상 타 본 적도 없어요.”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가 철썩 같이 믿었고 타인도 그렇게 믿게 했다. 그 잘못된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작은 글 하나, 문장 하나 쓰는 데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흐르는 식은땀을 책 읽기로 닦아냈다. 미스터리한 불길이 내 안에서 활활 타고 있는 것을 그때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말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물론 달라졌을 것이다. 더 나쁘게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이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의 ‘사이’를 탐험하면 알게 된다. 때로는 소름 끼치는 각성이 올라온다.

탐험의 좋은 도구가 글쓰기다. 기억 속을 탐험하면서 나는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작가가 될 거라고 말하는 다섯 살의 나를 소환해 냈으며 경필상(학창 시절 개근상을 제외하고 받은 유일한 상)을 타고 뿌듯해하는 일곱 살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나는 글씨 쓰는 게 일종의 명상이다. 좀 더 낯설고 천천히 쓰기 위해 왼손으로 쓴다. 일명 거울체(거울에 비춰봐야 글씨가 제대로 보이는 글씨체)로 쓴다. 중년 여자가 거울체로 글씨를 쓰며 마음을 차분히 하는 일의 근원이 일곱 살 때 있었다는 것을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왼손으로 글을 쓰면 머릿속 생각의 창공에서 푸드덕거리며 어지러이 날던 새들이 하나둘씩 내 곁으로 내려와 앉는다. 바람을 보며 그 결을 따라 나는 독수리 한 마리만 창공에 남겨둔다. 독수리는 나선형으로 돌며 부드럽게 날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는 몇 권의 아이디어 노트가 수천의 스승들과 함께 서 있다. 나는 이들로부터 자신감을 되찾고 의자에 내 몸을 묶어놓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타로 카드 역시 글쓰기처럼 탐험의 도구다. 자신을 성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도구 중 하나다. 글쓰기가 논리적이지만 비물질적인데 비해 타로는 비논리적이지만 물질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타로는 색깔이 있고 이미지라는 형태를 가지고 나름의 규칙을 갖춘 도구다. 글쓰기라는 추상성을 타로가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와 ‘지금’의 그 ‘사이’를 탐험하고 다양한 형태의 자서전을 내기를 바란다.

-『이야기타자기-이야기로 타로 배우며 자서전 쓰기』(2020, 부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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