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언가 암시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지요.이것은 인간의 인지체계에서 논리적 특성은 최근에 진화된 능력이며, 인간 진화의 대부분 기간에는 은유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박문호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 휴머니스트 615쪽)
엄마는 꿈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2012년 추석은 엄마의 꿈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은 날이다. 전국으로 흩어져 있던 가족 스무 명이 다 모였고 떠들썩하게 밥을 먹고 있을 때 엄마가 입을 열었다.
“꿈에, 어떤 커다란 손이 와서 종이쪽지를 하나 줬어. 신문에서 찢은 거 같은 종이야. 거기에 8자가 딱 적혀 있는데 그걸 보다가 깼어.”
오빠 언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메이저 8번 힘 카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삶에서 신문에 날 정도로 사건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는 여덟 살 때 어땠는지 물었다.
엄마는 “별일 읎었는데” 하고는 별일들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늘 배가 고팠다. 아버지는 술꾼이었고 어머니는 약초꾼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약초와 소박한 무구를 사용하여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 생계형 무녀였다. 농사지을 땅 한뼘 없는 깊은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가며 남편과 자식 셋을 먹여 살렸다. 그날도 배고픔이 아이를 언덕으로 이끌었다. 8살 되던 봄이었다. 진달래꽃이 먹음직스럽게 피어 있었고 아이는 허겁지겁 꽃을 따먹었다. 향긋한 꽃가루가 콧등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복통과 구토가 아이를 덮쳤고 아이는 맥없이 쓰러졌다.
“너무 배가 고파 철쭉을 진달래로 잘못 본 거야. 그렇게 잘못 먹고 죽은 사람이 수두룩하지. 그때 나도 죽었지. 눈을 딱 뜨니까 어메가 하이고 살았네 살았어 했어. 그라고 무슨 약물을 입에 넣어줬는데 그게 해독시키는 거야. 어메가 죽은 나를 살렸지.”
엄마는 마지막 말을 연신 되뇌면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삼키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살던 그 시골은 밤이면 아주 캄캄해. 어느 밤에는 자다가 깼는데 아무도 읎어. 아베는 또 어느 잔칫집에 가서 술 자시고 계실 거고, 어메는 동생 업고 어느 집으로 일하러 갔는지 아무도 읎는 거야. 무섭고 서러워서 어메 찾으러 간다고 집을 나섰는데, 어디서 온 동네 개들이 몰려와서 주위를 둘러싸고 풀쩍풀쩍 뛰고 하믄서 날 쫓아오네, 나는 무서워서 울고 개는 내 우는 소리에 짖고, 캄캄한 밤에 그러고 막 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어메가 쩌그서 달려오는 게 보였어.”
깊은 산골 별이 총총 뜬 밤, 작은 아이가 걸어가고 개들이 호위병처럼 아이를 에워싸며 걸어간다.
나는 그렇게 그려졌다. 엄마의 이야기가 내 마음으로 와서는 힘들 때 달려와 안아주는 엄마가 있으며, 충직한 야성의 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감동으로 와 닿았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 감응되어 말했다.
“엄마가 너무 아프고 힘드니까 할머니가 나타나서 여기 8살 때 생각해봐라 한 것 같아.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하지마라 하는 거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다.” 노인의 귀여운 표정과 수줍은 듯 말하는 음성이 모두에게 웃음을 주었다. 오빠 언니들은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며 재미있어들 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의 정서를 떠올리며 안정감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엄마는 심정지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그날 저녁 우리는 장례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엄마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8살 때 찾아왔던 그 죽음이. 그리고 그때처럼 기적같이 살아났고 3개월 뒤 떠났다. 그 시간 동안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은 당신의 야성적인 힘으로 생존할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엄마와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팔자로 온 운명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가로누운 8자형인 무한대 기호는 반복하며 오가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생 팔자이기도 한 것 같다. 어릴 적 죽다 살아난 그때의 경험이 일흔이 넘은 노인에게 무슨 의미로 되살아났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뇌는 꿈을 꿀 때 이전에는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해 어디서든 약하고 새로운 연관성을 탐색한다. 꿈 내용을 최근이나 더 먼 사건과 연결하기가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이유다.
(<당신의 꿈은 우연이 아니다> 청림출판 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