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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예니 Apr 10. 2024

효도를 하려니 끊임없이 아픈 엄마.

34살 내면아이는 오늘도 “엄마”라는 단어에 울지요.

나는 늦둥이다. 다른 부모님들에 비해서 우리 부모님 나이는 10년을 더 먹으셨다.

부모님이 결혼한 지 10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생하시다가 10년 만에 나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엄마는 69세. 아버지는 73세. 나는 어느덧 34살이 되었다.

사실 내 친구들은 다 결혼을 했다. 대부분 벌써 아이가 6~7살이다.

나도 20대 말쯤엔 결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살았다.


물론 연애는 여러 번 했었지만, 마음 아픈 시간들만 남겼다.

그렇게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직장에서 치이면서 살아내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가 34살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의 머리도 함께 하얀색으로 세어가면서.


그렇게 어느새 하얀 머리가 되어버린 나의 부모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도 남들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할머니, 할아버지” 하며 손자 손녀가 설날이나 추석 때마다 뛰어 안기는데

나는 편하게 명절이면 침대에 누워 쉬는 시간을 즐기며 밖에 나가지도 않고 점점 침대에서의 “와식 생활”을 즐겼으니. 부모님은 그 모습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12월에 돌연 듯 떠난 뉴욕 여행에서 나는 나의 인연을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봐서 여전히 운명적인 사랑을 바라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짙은 콧수염을 기른 텍사스 이혼한 아저씨가 나한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들이댄 것 외에는 영 ~ 인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뉴욕을 다녀와서 엄마의 지인을 통해서 선을 봤지만 엄마와 등질 뻔한 적도 있었다.

계속 선을 보라고 하고 엄마는 재촉하는 것 같으니 나로서는 뉴욕에서 돌아와 한껏 혼자의 낭만에 취해 있는데 그 평화로운 시간을 깨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짐을 부랴부랴 싸서 “다시는 나에게 선 보라고 하지 마!” 하며 엄마에게 못 할 말 다하며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는 자취 집으로 떠나 일주일을 엄마와 등졌다.


그래도 외동에 늦둥이인 나는 늘 엄마가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다가 늘 엄마는 아프기만 했으니, 엄마를 늘 등질 수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엄마에게 연락하여 내려갔더니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 꺼내도 될지 모르겠는데, 선 자리가 하나 더 있어. 이번 한 번만 더 보면 안 될까?……“


엄마를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어 나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실망만 하지 말자고 나간 선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과 조금 더 있고 싶다. 너무 괜찮잖아?’


그랬다. 그렇게 나의 운명을 만나게 되었다. 다들 “인연은 있다. 기다리면 온다. 네가 마음을 가볍게 가지면, 너로서 온전히 즐길 때 인연이 온다 분명히. “라는 위로(?)를 늘 해주었지만

그 위로마저도 믿지 않고 포기하며 내 시간을 드디어 비로소 즐기게 되었을 때 정말 인연이 나타났다.

이 사람이 나의 운명의 인연이 될 것 같은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그게 올해 2월 중순이었다.


그렇게 속사포로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한 달 만에 나는 프러포즈를 받았다. 마치 내가 그리던 영화 속 이야기처럼 모든 게 척척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제 부모님께 효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이 안고 있던 그 무거운 숙제를 드디어 내려놓게 해 드릴 것만 같았다.

엄마가 처음으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강변을 매일 운동하는데, 강변의 공기마저도 너무 아름답고 향긋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강변에 피는 꽃들도 형형색색 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게 늘 병마와 싸워대던 엄마에게 나도 이제 봄을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엄마가 매일 “딸 ~ 고마워. “라는 연락을 한지 한 달 조금 지나 디스크가 찾아왔다.

직장암 수술을 하고 늘 건강 문제로 고생하던 엄마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면역력이 더 무너져버려 순차적으로 하나씩 기다렸다는 듯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턱관절이 와서 밥을 예전처럼 씹을 수 없게 되어 몇 년을 고생해서 겨우 낫고 나니 이제는 디스크가 와서 겨우 걸음을 뗀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엄마가 아플 때 맑은 된장국을 끓여주던 게 생각이 나서 된장국을 끓이고는 그 앞에서 할머니가 보고 싶어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소리에 마음이 미어진다. 나도 언젠가 엄마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듯 , 세상의 영원한 내 편인 엄마를 찾아도 볼 수 없는 그 순간이 오겠지.

이렇게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와서 오전에는 통증의학과를, 오후에는 한의원을 다니며 어떻게든 딸의 결혼식에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 주어야겠다는 엄마의 말에

눈물을 연거푸 참아내며 뒤돌아선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엄마의 아픈 모습만 보게 하는 세상이 얄궂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도대체 엄마가 무엇을 그렇게 잘 못 했다고 늘 아프기만 할까.


엄마를 위해서 공부를 했고, 의엿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내 삶에는 모든 게 “엄마를 위해서 “ 였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한 번뿐이어야 할 결혼은 “나를 위해서” 하되, 엄마에게 드디어 지속되는 봄을 선사해드리고 싶었다.

“이쯤이면 많이 버티고 잘 산 거지. 엄마 나이가 있잖아.”

라는 말이 이상하게, 엄마가 스스로의 인생의 기약이 있음을 알고 있음으로 느껴진다.

남들처럼 손자 손녀를 안겨드리고 이제야 정말 엄마가 그리던 그 모습을 안겨드리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내 인생의 평생소원이 있다. 지금까지 외동딸로서 많이 받고 자란 만큼 엄마에게는 좋은 가방을, 아빠에게는 좋은 차를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내 월급으로 따박 따박 모아 부모님께 은혜를 갚기에는 아직 턱 없이 부족하다.

오늘은 더 늦기 전에 일단 엄마에게 그토록 바라던 명품 가방을 선물해 드리고 싶어 백화점으로 갔다.

매번 엄마가 “이 가방 어때?”라고 카톡이 올 때마다 좋은 가방 하나 없는 엄마에게

“별로야.”라고 퇴짜 놓던 내가 , 오늘은 엄마가 바라던 가방을 스스럼없이 샀다.


내가 엄마랑 살아온 시간만큼 엄마랑 더 함께 할 수 없음을 안다.

엄마와 내가 어떤 아프고 쓴 인생을 살아내 왔음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엄마와 너의 지나친 연결 고리를 좀 분리해.”라고 사정없이 말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저마다의 말하지 못할 스토리와 상황과 맥락이 스며들어있다.

남의 오지랖에 설명하거나 대꾸할 가치도 없다.


그저 나를 위해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놓지 않고 잇고 덧대어 살아온 엄마를 위해

때로는 투닥거리더라도 엄마의 솜이불이 되고 싶다. 할머니처럼 엄마를 보듬지 못하겠지만, 엄마의 세월에 늦지 않게 새싹을 틔워 한껏 맛보게 해드리고 싶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을 거의 늘 찍은 것 같다.

언젠가 이 음식들의 온기마저 너무 그리운 순간이 올 것 같아서.


내 삶의 모든 배경엔 엄마가 참 많이도 따뜻하고 아프게 스며들어있다.


“엄마”라는 두 단어에 여전히 뭉클해 눈시울이 붉어져 앞을 가리는 여전히 난 34살 어린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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