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유와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
오늘은 내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본질적이고 필수 요소라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사랑"없이 살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사랑"없이 살아도 되는 존재는 로봇이 아닐까. 꼭 남녀만의 사랑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선생님이 학생에게 주는 사랑,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 등 사랑의 대상은 다양하다. 그러니, 그렇게 다양한 대상과에서도 사랑을 원치 않는다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아예 지니지 않는 무감각한 로봇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사랑" 무엇일까? 꼭 남녀가 서로 좋아서 1분 1초도 보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사랑일까? "사랑"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우선 이야기해보겠다. 오늘의 사랑은 남녀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보겠다. 그리고 사랑의 정의는 곧 사랑의 이유와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1. 누군가의 "인정"과 "이해"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
연애를 곧 시작한 남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기를 시작한다. 즉 "매력 어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매력에 익숙해지는 사랑의 후기보다 초반의 "호기심"과 "신비로움"덕분에 더욱 상대방에 끌리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상대방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보따리 속의 매력을 하나둘씩 꺼내놓는다. 서로가 어떤 존재인지 인정의 결투 장에 나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펼쳐주는 단계이다. 상대방을 통해 내가 얼마나 이성에게 매력적인 상대인지 확인한다.
만난 지 50일째 까지는 서로 데이트가 있는 날은 한 껏 멋을 내고 향수를 뿌리고 가슴 떨림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50일이 지나고 100일이 지나면 100개의 매력 주머니를 다 보여 준 남녀는 이제 어느덧 "편함"의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서로가 처음 만났던 그 설렘에서 벗어 나와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성격이나 행동이 조금씩 묻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100일부터가 정말 중요한 순간이라 생각한다. 100일 전은 꾸며도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려면 얼마든지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100일을 기점으로 운전 습관이나, 평소의 앉는 버릇 등 서서히 자신의 원래 성격이 드러나기 딱 좋은 시기이다. 꾸미기가 설레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편한" 본인의 원래 습성을 제일 확인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때부터 연인은 조금씩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의 "조심스러움"을 깨고 서로가 이해받기를 원한다. "인정"할 수 없는 것도 "인정" 받고 싶어 한다. 나는 이래서 섭섭하고, 상대방은 저래서 섭섭하다. 의견차이가 조율이 되고 좁혀져서 교집합이 생기면 연애 지속 가능성이 길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듯 끊임없이 다른 세상 속에 사는 것 같다면 이 만남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뇌 연구 결과에서도 100일을 기점으로 상대방에게 "사랑"에 대한 설렘의 호르몬이 끝난다고 한다.
100일부터가 찐 "연애"인 것이다. 그전에는 "너는 어때?"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로 끝났다면, 이제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서운해."로 점차 자아 표현의 단계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때 서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기를 원한다. 물론 인간 보편적인 생각 이하의 행동이나 말이면 이해를 할 수 없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방은 '나의 이런 부분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을 시험대 위에 놓고 싶어 한다. 즉 서로의 성격이나 관습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형성해 온 자아의 과정 전체를 "존중"받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자가 미치고 환장한다는 여자의 "괜찮아."라는 말 너머에 있는 진짜 의미인 "안 괜찮아."를 헤아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의 맥락과 맥락 사이를 짚어주어야 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게 사랑이다.
누구나 "표현"하고 내 말 뜻을 "이해" 받고 싶어 한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갓난아기도 "눈물"로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한다. 이해는 너의 다른 세계를 나의 다른 세계로 초청하겠다는 뜻이다. 다름을 보살핌 받고 싶은 "이해"가 사랑의 우선 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 이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2. 상대를 통해 "안정의 욕구"를 채우는 사랑
환승 연애 프로그램은 굉장히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결국 그 프로그램의 취지는 (출연을 통해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헤어졌던 연인이 다른 연인에게 흔들리는 것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확인하고 복수심에 불타 나도 사랑이 아닌 감정으로 다른 연인에게 호감 표시를 하기도 하면서 전 연인과 헤어졌던 본질적인 문제도 잊은 채 이별이 미화되어 갑자기 헤어진 상대를 질투의 감정으로 인하여 더욱 사랑하게 된다. 결말에서는 대부분의 커플이 재회하게 된다. 다른 이성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숨겨졌던 그 사람의 대한 마음이 더 견고해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헤어졌던 연인을 단지 "소유"하기 위해 소유의 여신으로 활활 불타 재회를 하는 것이라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연과 희두의 연애의 싸움이 제일 떠오른다. 볼 때는 '저렇게 싸울 거면 아예 대화를 안 하면 되지 왜 둘은 만날 때마다 저렇게 치고받고 싸울까?' 싶었다. 그전에는 나는 싸우는 연애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이 조용한 이별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전 남편과 만나기만 하면 너무 가치관이 달라서 싸우기만 하다 헤어지고 보니 이 나연과 희두의 싸움이 이해가 갔다. 서로가 사랑을 하고 있되,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통해 "안정"을 느끼고 싶은 존재였다. ' 너 나 사랑해? 그럼 상대방에게 흔들리지 말아 줘. 나에게 더 확신을 줬으면 좋겠어. 난 아직 너 사랑 해'라는 표현을 나현은 서툴게 하고 있었고, 희두도 끊임없이 나연이 다른 누군가의 남성과 잘 돼 가고 있는 과정을 보고 운동을 하는 터프한 사나이가 프로그램을 찍다가 못 하겠다며 울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나연과 만날 때마다 싸우고 또 싸운다. 희두도 잠시 다른 이성에게 흔들리기는 했으나 거칠고 매정하고 굉장히 이성적만 '나연'을 향한 순박한 마음은 변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지금 나연과 희두는 서로가 극 F, 극 T라고 하면서도 너무 예쁘게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우는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겼을 때 안정을 느끼고 잠잠해진 채 잠이 든다. 비가 오기 전 말 못 하는 새들은 비와 폭풍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낮게 난다. 모든 생명체를 메슬러의 욕구처럼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즉 나는 사랑에 있어서는 "안전"보다는 감정에 조금 더 적합한 "안정"의 욕구를 인간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나의 옆에 있어준다는 것.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도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안정의 결핍을 채워주는가.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도 얼마나 안정감을 갖게 하는가.
3. 왜 나는 사랑하고 싶을까?
인간은 본디 외로운 존재이지만 친구 이상으로 함께할 편안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사랑에 크게 데이고 아프고도 사랑이 하고 싶다. 이렇게 홀로 평생 지낼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랑이 늘 하고 싶을까? 개인적인 성찰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를 짚어보았다. 물론 위의 두 가지 이유가 크기도 하지만,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는 편이다. 내가 전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처음 봤을 때 좋았던 그 느낌이 잊히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소개팅에서 한 번도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 처음부터 딱! 마음에 들고 설렜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랑 싸울 때면 남편의 처음 봤을 때 좋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 순간을 잊지 않기로 했었다. 나는 운명론자였고, 쏘울메이트를 믿고 싶었다. 그렇게 동화 같은 운명을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운명 두 번만 믿었다간 사람 팔자 큰일 날 뻔했다. 이제 동화책 신데렐라 이야기는 접어두고 결혼은 현실이다. 첫 번째에서 이야기했듯이 100일 이후의 드러나는 이상의 찐 모습에서 서로 맞춰가며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럼 왜 굳이 사랑을 하냐. 친구랑 여행을 가면 되고, 친구랑 주말에 보면 되지. 그것으로도 외로움을 채우면 될 것 아니냐. 그런데 이성이랑 사랑을 한다는 것은 친구 이상으로 더 재미있고 편안하다. 친구도 남이고 이성도 남이기 때문에 여행 내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 배려에 대한 부담이 덜할뿐더러 (그렇다고 이성을 막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똑같은 배경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사랑의 마법이 있다.
어머니가 좋아할만한 빵을 잔뜩 사서 가면 "내가 이거 예전에 이 빵 안 좋아한다고 했었는데?"라고 한다. 이렇게 34년을 엄마랑 살아도 엄마를 다 모르는데, 몇 년을 알게 된 이성은 어찌 다 알겠는가? 이성과도 평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새로움을 발견하고 창출하는 재미는 공부를 통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공부는 자발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심적인 부담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런데 연애는 다르다. 내 마음 가는 대로 부담 없이 가볍게 따라가되, 이성의 몰랐던 부분을 끊임없이 광산을 캐듯 발굴해 가는 과정이 인간의 왕대한 호기심을 채워준다. 다르지만 몹시 편안하고 안락한 상대가 이성인 것이다. 친구 이상으로 알아갈 편안한 내 짝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랑은 정말이지 너무 추상적이지만 인간이 가지게 되는 원초적인 감정이라 왜 사랑을 하는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명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사가 진단을 내려서 내 병명을 명확하게 알게되듯, 우리가 왜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어떤 사랑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정의를 통해 "사랑을 하는 이유"와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았다. 외롭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불안정 애착형"은 절대 사랑으로 그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도 아니다. 양방향 통행이 원활히 이루어질 때 건강한 사랑의 혈류가 흘러갈 수 있다. 나와 잘 맞는 상대를 맞는 것도 어렵지만, 상대방을 알아가며 맞추어 가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그렇지만 서로 인정해 주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건강한 사랑을 나누며 살았으면 한다. 사랑의 묘약은 정말로 위대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수고초심(首丘初心) 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쓴 맛을 보고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싶다. 사랑의 위대함을 알기에. 그렇게 여우처럼 나도 끝까지 사랑의 무덤쪽을 향해 세상을 끝낼것 같다. 세상을 조금 더 풍족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사랑이라는 낭만을 아직까진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