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다지오가 비바체를 만날 때

by 한상영변호사

아내는 모든 게 빠르다. 빠르다 못해 내 느긋한 이성으로는 이해가 전혀 안 될 때가 많다. 아내의 빠른 직감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A->B->C->D 단계에서 내가 B 단계를 분석하며 머리로 한참 따지고 있을 때 아내는 직감으로 이미 D를 간파한다.


다니던 새한종합금융 직장에서 회사의 자본금을 늘리는 증자를 실시했다. 무상은 아니고 주식에 대한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유상 증자였다. 상장회사이기 때문에 증권시장에서 일반 투자자로부터 공모 청약을 받았다.


당시에 증권시장이 호황이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서로 주식을 배정받고자 경쟁했다. 회사 직원들에게는 우리 사주 몫으로 일정 비율이 먼저 배정되었다. 직원들은 앞 다투어 우리 사주 청약 신청을 했다.


최근의 카카오게임즈 회사의 유상증자처럼 청약 광풍까지는 아니지만 당시 새한종합금융 직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사주 청약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볼 정도였다.


나도 당연히 직원으로서 우리 사주 배정 신청을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우리 사주에 대해 설명하고 놓치면 손해라고 상세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아내의 첫 반응은 완전 예상 밖이었다.


우리 사주라고 하더라도 공짜가 아닌 이상 회사에서 대출을 받아 그 돈으로 주식을 배정받는 것인데 왜 빚을 내어 주식을 사느냐며 다짜고짜 반대를 했다. 아내의 직감이 발동한 것이다.


나는 아내가 이렇게 강하게 반대할 줄 몰랐다. 우리 사주는 회사의 모든 직원이 신청했을 정도로 괜찮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시가보다 저렴하게 배정받는 것이고 나중에 주가가 올라가면 이익이 많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문제로 그날 저녁 내내 아내와 옥신각신했다. 회사 전 직원이 우리 사주를 받는데 나만 안 받는 것은 바보짓이 아니냐며 아내를 설득했다. 결국 아내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예정대로 우리 사주를 배정받았다.


우리 사주는 퇴사, 결혼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일정 기간 매각을 하지 못하는 조건이 붙었다. 저축한 셈 치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의 빠른 직감이 맞았다는 것은 3년 후에 정확히 사실로 입증되었다. 갑자기 IMF 사태가 터져 회사 주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듬해 회사는 결국 부도 처리되었다.


당연히 주가는 거의 제로 수준이었다. 우리 사주를 배정받기 위해 대출받은 돈은 그대로 우리의 빚이 되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애꿎은 퇴직금만 많이 줄었다.


비바체처럼 템포가 빠른 아내를 만나 이제 거의 30년의 결혼생활을 향해 가고 있다. 아다지오처럼 느린 남편이 아내에게 적응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서로 많이 좋아졌다. 세월이 흐르며 내가 비바체로 변해가듯 아내도 아다지오가 되기 위해 무던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템포가 다른 것이 그동안 부부싸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아내는 빠른 결론을 원했다. 반면에 나는 과정을 중요시했다. 나는 중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만 했다.


이미 결론에 도달한 아내와 중간 과정에서 이해가 필요한 남편 사이에 시간상으로 미세한 간격이 있었다. 아내는 주저하고 신속한 반응을 하지 않는 남편을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나는 완벽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생각하고 추론하고 분석할 시간이 필요하여 아내에게 빠른 반응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간격이 감정적으로 느껴지면 아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하여튼 컴퓨터로 비유하면 일종의 시스템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였다. 이를 어떻게 조화시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보낸 결혼 생활을 3단계로 나누면 초기에는 좌충우돌이었다.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인 파악이 안 되었다. 서로가 각자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들이었다.


각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표출하는 것이 더 많았다. 나는 나대로 나의 프라이드를 지키려고 했다. 아내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서로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였다.


당시에 만약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상의 세계에서 부부관계를 쌓아 갔을 것이다. 아내는 그것을 가장 싫어했다. 각자의 허물이 적나라하게 수면 위로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다.


사건의 본질을 마주 대하며 서로 간의 의견과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고 시시때때로 그것이 다툼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다. 충돌이 생기니 다행히 서로의 마음이 아프고 내면에 상처를 입은 경우도 생겼다. 그래도 아내는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픔과 상처가 뻔히 예상되는데 누가 그런 악역을 맡고 싶을까. 아내는 악역을 기꺼이 감수했다. 아내는 현재의 아픔보다는 미래의 잘 개선된 부부의 모습을 지향했다. 부부관계가 더 좋아질 거라는 비전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에 남편과의 혹독한 전투(?)도 불사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각자가 변화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냥 변화가 아니라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모습이 되려는 변화이다.


아내가 불이라면 나는 물이었다. 불 같이 뜨겁게 활활 타오르던 아내가 물 같은 남편을 만나 살게 되니 조금씩 불이 식어 갔다.


아다지오처럼 느린 나는 아내의 급한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다. 100% 이해가 되어야만 했던 태도에서 80%까지만 이해가 되어도 대화를 했다.


나머지 20%의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가운 물이 아내의 불을 받아 서서히 뜨거워진 것이다.


이제 결혼 30년째를 향해 가는 세 번째 단계에 있다. 서로 많이 변했다. 물 같던 내가 가끔은 불같은 모습이 되어 있다. 내가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불같았던 아내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라”라고 조언한다. 비바체 같이 빨랐던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았을 아내의 깊은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이다. 상전벽해의 변화다.


삶은 계속 변하는 과정이다. 성숙을 위해 계속 변할 것이다. 아다지오였던 남편과 비바체였던 아내가 중간 어딘가에서 만나 모데라토의 조약돌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keyword
이전 16화변호사의 공감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