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이었다. 다음 날은 매우 중요한 재판이 있을 예정이었다. 고객은 우리나라의 가장 규모가 큰 정부 공기업 중 하나였고 상대방은 지방자치단체였다. 공공기관끼리의 다툼이었고 소송가액도 매우 많은 큰 사건이었다.
늦은 저녁 사소한 일 때문에 아내와 말다툼이 생겼다. 다툼이 자정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내는 빨리 결판을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았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깜박 잠이 들었다. 피곤이 약간 풀어졌다.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인가? 아내는 그동안 한 숨도 못 자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내를 신경 쓰지 않고 쿨쿨 자는 태도가 아내를 더 화나게 했다. 거의 새벽 시간까지 언쟁을 벌였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되는 재판정에 갔다. 합의부 사건이라 판사 3명이 재판정에 위엄 있게 앉아 있고, 상대방 변호사도 나와 있었다. 내 사건의 차례가 돌아왔다.
변론이 시작되었다. 서로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런데 어제 아내와 밤새도록 말다툼을 하며 미리 변론 예행연습을 했던 탓일까? 내 입에서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 자신도 약간 놀랬다. 강하고 단호하게 내 주장을 펼쳤다.
상대방 변호사는 꼼짝 못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만 지켜보았다. 재판정에 있는 앉아 있는 판사들도 나의 강력한 어조에 약간 흠칫 놀란 눈치였다. 어쨌든 그날 나는 매우 강력한 변론을 펼쳤다.
다행히 이 사건은 최종적으로 내 쪽에서 승소하였다. 아내와 사전 변론을 미리 잘 연습해 놓아서 그랬을까? 농담으로 아내 덕분이라고 말하며 아내를 놀려댄다. 지금도 가끔 아내와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의 부부싸움이었다.
사실 노련한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변론할 때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판사가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상대방 변호사의 변론에는 허점은 없는지, 짧은 변론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악한다.
경험이 부족한 변호사나 변호사 도움 없이 직접 자기 변론을 하는 당사자는 법정에서 자기주장만 내세우기 쉽다.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자기 말만 하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변론해야만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부부간의 말다툼도 일종의 변론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원칙은 싸움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인 것 같다. 즉 서로가 재판정을 지키는 것이다. 같이 함께 한 자리에서 대화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실제로 실행하기는 어렵다.
아내와 말다툼이 시작되면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집을 나가 조용히 산책을 하며 아내가 꺼낸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한다.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대충 내 딴에는 문제가 풀렸다고 생각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온다.
문제가 다 풀어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그 사이에 더 화가 났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당사자 중 한 명이 재판정을 떠났는데 재판이 온전히 진행될 리가 만무이다. 아내와 마주 보고 변론을 즐겨야 문제가 해결된다.
부부의 말다툼에서 중요한 다른 원칙은 변론에서 지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점이다. 법정에서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변론을 한다.
하지만 아내와의 변론에서는 법정 변론과는 완전 정반대로 가야 한다. 물론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니까 부부싸움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끝 무렵에 가서는 결국 서로 양보해야 한다.
법정에서는 이기면 기분이 좋다.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변론에서는 이겨도 기분이 좋지 않다. 나에게 이익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다. 이기는 게 이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 법정에서는 이겨야 이익이 되지만, 가정에서는 지는 자가 가정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