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수년 전에 먼저 돌아가셨다. 이후 동갑이신 어머님 혼자 시골집에 살게 되었다. 자녀들 모두가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을 돌보는 게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자주 어머님을 찾아뵙고 돌보려고 노력했다. 아내, 두 딸과 함께 시간을 내어 서울에서 몇 시간 걸려 시골에 도착하여 어머님을 뵙고 돌아오면 항상 짧은 시간에 아쉬움만 남았다.
시골집에 혼자 계신 어머님은 어지럼 때문에 자주 넘어지셨다. 얼굴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실내 화장실이나 부엌에 갈 때는 가능하면 엎드려 기어가시라고 말했지만 말이 그렇지 현실성이 없는 조언에 불과했다.
하는 수 없이 읍내에 있는 요양원에 모셨다. 한 방에 여럿이 생활하기 때문에 약간은 불편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어머님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뵈러 갔다. 요양원에는 어머님 또래의 노인들이 수십 명 생활하고 있었다. 1층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남성 노인방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여성 노인방이 있었다.
어머님을 뵙고 조그만 선물을 드렸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의류품이었다. 어머님은 선물을 받아 들고 좋아라고 했다.
어머님 옆 침대에는 어느 여성 노인분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방의 출입문 쪽에 있는 침대에서 생활했다. 낮이어서 비슷한 또래의 남성 노인분이 같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남성은 계속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침대 주위를 정리했다. 이불을 정리하고, 식사 때는 여성이 잘 먹을 수 있도록 식사를 챙겼다. 여성은 그런 남성의 행동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참 사이좋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딸처럼 보이는 여성이 방문했다. 두 노인은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아내와 함께 그 가족을 지켜보다 그 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딸에 의하면 어머님은 치매환자라고 했다. 지금 어머님은 아버님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딸인 자기는 알아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기묘했다. 그 남성 노인은 자신이 남편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부인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건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요양원에 들어 올 이유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자기 부인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려고 바로 맞은편 복도에 있는 남성 노인방을 배정받았다.
아침저녁으로 부인 방에 오가며 아침에는 이불을 개고 저녁에는 부인이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보살폈다. 식사 때는 물론이었다. 노인이 된 남편의 그 지극한 사랑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 후 어머님은 둘째 형님이 모신다고 하여 그 요양원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한 쌍의 노인 부부가 그 후 언제까지 그 요양원에 계시는지 이제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이루었을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있었다. ‘노트북’이라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아내는 치매 노인 환자였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벤치에 앉아 노트를 넘기며 누군가의 러브 스토리를 아내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치매환자인 아내는 남편이 설명해 주는 러브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아내는 그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자신이었다. 치매 환자인 아내는 그 러브 스토리가 자신의 이야기인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노트북 영화에서 남편은 아내의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지내며 아내를 보살폈다.
치매에 얽힌 부부관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현실과 영화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자 가슴에 뜨거운 감동이 왔다.
내가 마주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이다. 그럼에도 당연한 전제가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 치매라는 질병의 무서운 파급효과다.
젊었을 때부터 가꾸어 왔을 둘 사이의 아름다운 부부관계가 노인이 되어서도 이런 무서운 질병의 영향력을 이겨내고 지고한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치매보다 더한 죽음마저도 그 사랑의 견고함을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