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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시간의 거리

by 한상영변호사

18세의 그녀는 6. 25 전쟁 직전인 1949년에 남편과 결혼했고, 곧 아기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터진 6. 25. 동란으로 인해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남편을 65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이미 북한에서 재혼한 상태였다. 84세가 된 그녀는 결혼식 때 신은 신발을 이때까지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아들도 65세 노인이 되었다. 65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재가도 하지 않고 혼자서 아들을 키웠다. 그 아들을 데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남편을 다시 만나는 그녀의 심정을 어느 누가 알랴? 2015년에 있었던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때 있었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이다.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65년의 긴 세월은 바로 엊그제나 매 한 가지였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도 남편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저지할 수 없었다. 65년 전 남편은 그녀의 마음에선 항상 그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부부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큰 감동을 주는 위 이야기와는 반대로, 시간이 흘러 부부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A를 내 사무실에서 만난 건 2007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73세였다.


70대가 넘는 노인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이혼소송을 하기 위해서였다. 황혼이혼인 것이다.


나는 변호사가 되면서 이혼소송은 절대 수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남의 가정을 갈라놓는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 있는 부부 사이에 변호사가 개입해서 법적인 주장을 시작하면 부부관계는 결국 회복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라도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면 변호사가 조언해 주는 법적인 근거를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승소할 가능성 있는 것인지의 문제로 상황이 바뀌어 간다.


그래서 부부 갈등 문제로 상담을 의뢰하면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내가 이혼 소송의 변호사로 선임되는 순간 그 가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쉽다. 내가 선임을 거절하면 그 의뢰인은 누군가 다른 변호사에게 찾아 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동안 남의 부부관계를 깨뜨리는 데 조그만 피해라고 주고 싶지 않았다. 나로서는 다른 분야에서 돈을 벌면 되었고, 설사 못 벌어도 먼 훗날 나 자신에 대해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A의 사례는 고민이 되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70대 중반의 고령이었고, 부인에 의해 자택에서 쫓겨나 거주할 곳이 없어져 어느 지역 경로당에서 전전하고 있었다. 그가 벌어 놓은 돈으로 부인이 지방도시에 아파트 2채를 샀는데, 모두 부인 명의로 해 놓아서 그의 명의로 된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노후에 살아갈 생활비도 전혀 없어 굶어 죽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인은 아파트 한 채는 월세를 주어 생활비를 벌고, 나머지 한 채에 부인 혼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혼소송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미 부인이 그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먼저 제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에 대항하여 단지 반소의 형태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며, 이혼 소송의 목적은 그가 노후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재산분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수임하기로 결정했다.


고령의 노인이 되어 갈 곳 없는 홈리스의 부랑자 신세가 될 것이라며 두려움에 떤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혼소송은 단지 그의 노후 생계유지라는 생존권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A의 사건은 지금까지 15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수행했던 2건의 이혼소송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내 아버지와 같은 나이를 드셨다. 16세에 결혼하여 57년간 이어져 온 결혼생활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결혼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 간에 배려심이 없어지고 싸움과 폭언이 잦아졌다. 현재 부인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의 분할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결혼생활 동안 그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일해 왔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준비서면을 작성해야 했다.


이혼소송이라는 것이 특별히 고도의 연구가치가 있는 법적 쟁점이 별로 없었다. 단지 당사자가 느끼고 주장하는 결혼생활에 대해 그에게 유리한 주장들을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지는 제삼자인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상대방의 반박 서면을 읽어보면 내 의뢰인의 주장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경우도 많았다. 어떻게 보면 57년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두 사람의 긴 인생사에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주장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손자까지 여러 명 둔 노인의 황혼기 다툼을 대리하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어쨌든 그의 노년기의 생존권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 최선을 다했다. 재판정에 참석한 부인의 태도를 직접 살펴보니 남편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으나 증인으로 나온 자녀들이 부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였다. 정말로 그의 잘못이 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그는 현재 재산도 거의 없는 신세로 전락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재산의 명의가 부인 앞으로 되어 있어서 자녀들이 실질적인 경제력을 가진 어머니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사건의 결론은 내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와의 연락은 끊겼다. 가족들과 잘 타협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생계는 잘 유지하고 있는지, 여전히 가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행한 두 번째의 이혼사건은 B의 경우였다.


2015년에 만난 그녀는 60 초반의 여성이었다.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으나, 알고 보니 남편은 폭력 전과범이었다. 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큰 문제가 없겠거니 생각했으나, 결혼 얼마 후부터 남편은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본인이 낳은 아들도 챙길 여유가 없었다. 피신하여 나온 그녀를 남편은 그녀의 형제자매까지 협박하며 소재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그 사이 그녀는 성실한 남자를 새로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도 장성하였다. 어느새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남편과는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었고 만남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새 남자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가 30대로 접어 들어가면서 가족법상의 법적인 지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전 남편과 혼인관계가 남아 있어서 새 남자와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우리 법에서 금지하는 중혼(중복 혼인 상태)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새 남자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를 가족법상 정식으로 떳떳하게 등록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들의 가족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혼 소송은 이를 위한 수단으로 필요했다.


이어 이혼소송을 진행하였는데, 흔히 하듯이 상대방이 그녀를 상대로 이혼청구를 하는 반소를 제기하였다. 반소 청구 내용 중에는 얼마 금액의 위자료 청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 상대방은 얼마 전의 폭력 문제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상대방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는데, 그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장문의 서면을 제출하였다. 변론이 개시되어 실제 재판정에서 그를 보니, 상당히 언변이 뛰어나고 자기주장을 매우 강력하게 피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혼생활에 대한 쌍방의 주장이 옳은지 조사하기 위해 가사조사관에 의한 조사절차가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내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폭력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재판이 다소 길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법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대방이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간단하게 종결되었다.


이혼소송은 그녀가 제기한 본소 청구나 상대방이 제기한 반소청구 모두가 소송 종료 선언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혼소송이라는 것이 당사자에게 일신 전속적인 것이라서 당사자가 사망하더라도 상속인에게 수계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이혼소송 중에 당사자가 사망하면 사건의 승패 없이 사건이 종결 처리된다는 선언(소송 종료 선언)을 법원에서 하는 것이다.


한편 상대방이 이혼소송(반소)에 추가하여 제기한 위자료 청구 부분은 금전청구이기 때문에 일신 전속성이 없어서 이혼소송과는 달리 소송이 계속되었다. 즉 사망자의 상속인에게로 소송이 수계 되어야 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상속인인 자녀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수계 신청을 하였다. 결국 의도치 않게 그 자녀가 원고가 된 상대방의 위자료 청구는 전부 기각되었고, 그녀의 전부 승소로 종결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망으로 혼인관계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남편의 가족관계와 혼인관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는 새 남자와 재혼이 가능해졌고, 그와의 사이에 낳은 친 아들도 둘 사이의 친자녀로 어엿하게 가족관계부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초기의 짧은 결혼 생활만 있었을 뿐, 폭력 문제로 오랜 세월 동안 만남도 없고 사실상 이혼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 어느 부부의 슬픈 사례였다.


C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혼인생활 한지 10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부인에 의해 이혼소송의 피고가 된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변호사를 선임하면 부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갈까 염려하여, 변호사 선임 없이 사건을 진행하고 싶어 했다. 나도 애당초 이혼사건은 수임하지 않는다는 나만의 원칙이 있어서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고 단순한 상담만을 해 주기로 했다.


상담을 해 본 결과 부인과의 관계가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시댁문제였다. 직접 부인과 통화를 해 보았다. 남편은 시댁과 문제가 생길 때 자기편은 들지 않고 시댁 편만 든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부인의 좌절감은 결혼 10년 동안 심하게 악화되었다.


그 부인의 태도는 완강했다. 내가 변호사이기 때문에 대화가 더 어려웠다. 변호사가 나중에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을 역으로 이용할까 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는 나도 결국 손을 떼었다. 상담자로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아직은 아이들도 나이가 어리고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노력하면 좋으련만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


되돌아보면 웃고 울며 부대끼며 같이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이다. 65년 만에 만난 노부부처럼 순간의 만남이 너무 소중해서 몇십 년 세월이 지나도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영원할 수 있는 게 부부 관계이다. 부부 사이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마음의 거리는 바로 앞 지척에 있다. 세상의 모든 부부가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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