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몇 년 전 돌아가신 후 어느 날 갑자기 농협으로부터 강제집행 통지서가 도착했다. 상속재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80대 초반까지 사신 아버지는 젊었을 때 군 복무하다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어 이후 평생 동안 절뚝절뚝 한쪽 발을 기우뚱하게 걸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걸음걸이는 어찌나 빨랐는지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언젠가 집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가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계속 뒤처지곤 하여 뛰어서 따라잡아야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나는 기분이 우쭐했다. 같이 따라나선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왜 그렇게 걸음이 빠르냐?”라고 나에게 부러운 듯이 물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길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불평이나 짜증이 없었고, 항상 밝은 모습이기만 했다. 뒤를 따라가던 나는 그런 아버지가 참 좋았다.
아버지는 국가의 보상으로 고향 근처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에 소사로 취직했다. 소사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학교의 모든 잡일, 허드렛일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소사 일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철에는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미리부터 조개탄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에 가서 조개탄을 꺼냈다. 그리고 각 반마다 설치되어 있는 난로에 불을 지폈다. 이를 위해 불편한 다리를 끌고 집에서부터 기우뚱 걸어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교실이 10개 이상은 족히 넘어 아버지는 여러 번에 걸쳐 각 교실로 조개탄이 든 양동이를 들고 오갔다. 조개탄은 쉽게 불이 타오르지 않아, 신문지 같은 종이에 불을 붙이며, 한참 동안 불을 지피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 와중에 연기가 계속하여 피어올라 콜록콜록 기침이 나왔다.
눈이 길에 함박 쌓이면, 어린 학생들이 교문에서 교실까지 들어오는 200여 미터까지 눈길을 내는 것도 고스란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수북이 쌓인 눈들을 빗자루로 길 양쪽으로 몰아서 쓸어 올리고 가운데로 가지런히 길을 내었다.
그렇게 학교 등교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깨끗이 쓸어낸 길 가운데를 걸어 재잘거리며 편안히 교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조개탄 난로 주위로 몰려들었다. 난로 위에는 교실 공기가 탁하지 않도록 아버지가 미리 떠다 놓은 물 주전자가 항상 올려져 있었다.
유리창이 깨지면 아버지는 그 부분을 유리칼로 오려낸 후 빈 공간을 새 유리로 채워 넣었다. 학생들은 유리칼에 의해 유리가 반듯하게 짝 갈라지는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교실바닥 나무 조각이 바닥에서 빠져나와 헐겁게 되거나 창틀이 삐쳐 나오면 장도리(망치)와 못을 들고 와서 수리를 했다.
학생들은 그런 아버지를 좋아했고 선생님들도 아버지를 존대했다. 선생님들은 같은 또래인 나의 아버지가 불평 한번 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신뢰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62세로 퇴직할 때까지 발령이 나는 학교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한 결 같이 일하며 가족을 모두 부양했다.
이후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받은 퇴직금은 다른 자녀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져갔고, 그 자녀들의 빚을 아버지가 대신 갚아 주느라 모두 사라졌다.
그래도 아버지의 얼굴은 항상 평온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한쪽 발을 기우뚱거리며 평생 동안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은 아버지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른 자녀들이 아버지의 그런 퇴직금을 다 가져갔어도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는 남아 있는 연금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뇌경색이 발생하였고 다행히 회복은 되었지만 장애를 입은 다리는 더 절게 되었고, 그의 몸은 전체적으로 쇠약해졌다. 이후 지팡이를 짚으며 생활하였지만 항상 긍정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형님 한 분이 고향집에 와서 아버지와 함께 거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읍내에 소재한 요양병원에서 병상을 채우려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홍보를 했다. 그들은 “나이 든 노인들을 요양병원으로 데리고 가면 잘해 준다”라고 말하며 유인했고, 그 말을 믿은 그와 어머니는 아버지를 읍네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한방에 5~6명씩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요양병원 침대에서 하루 종일 생활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자식들이 어떻게 잘 사는지 염려하셨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생활하면서도 항상 평안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가 불필요한 침대생활로 아버지의 건강이 더 쇠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그 길로 요양병원에 찾아가 다시 고향집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집에 다시 돌아온 후에도 형님, 어머님과 사이좋게 온유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 안에서 편안히 잘 지내시다 몇 년 후 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다른 방에 들어가다 나올 때 높은 문지방에 다리가 걸려 몸이 고꾸라졌다. 그 사고로 예전에 군대에서 부상을 입어 철심을 박았던 다리의 뼈가 몸속에서 부러졌다. 부러진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온몸으로 순환하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같이 거주하던 형님이 아버지를 읍내의 정형외과 병원으로 모셨지만 그곳에서는 뼈만 치료하였다. 그 병원은 몸 내부에 출혈이 일어나 온몸으로 퍼져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형님은 아버지를 다시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갔고 그곳에서 며칠이 지났다.
그즈음 요양병원을 방문한 나와 아내가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대형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병원에서는 내부 출혈로 인해 생명이 위독하다며 그날 밤을 넘기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어 응급조치를 취했고, 그 날 이후로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먼 도시에 살고 있던 나는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킨 후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살던 도시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병원 측에 연락해 상태가 어떤지 매일 체크하였고 몇 번은 직접 찾아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의식불명이 된 지 어느덧 20일이 지난 것이었다.
다행히 나와 아내가 아버지를 찾아 간 날 20 여일 만에 처음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오랫동안 무의식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 주위에 누가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는 나와 아내, 두 손녀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형은 잘 있느냐? ”
20여 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내뱉은 아버지의 첫 물음은 형을 무의식에서까지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아니, 천상에서 지상으로 울려오는 영원한 사랑의 언어 그 자체였다.
나는 “형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했다. 이후 아버지는 결국 불편했던 그 한쪽 다리를 무릎 아래로 완전히 절단해야 했다. 그렇게 절단된 다리로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 6개월을 더 사시다가 천국으로 떠나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입에서 신세를 한탄하거나 어머니와 자식들을 원망하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거주하던 요양원에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밝은 얼굴로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절단된 다리로 인해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고, 배설마저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온유한 얼굴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에게 줄 남겨진 재산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에게는 유족연금을 남겨 놓아 어머니의 생계는 아버지께서 끝까지 책임지셨다. 시골에 있는 얼마 되지 않은 논과 밭은 있었지만, 그 조그만 재산마저도 다른 자녀의 빚 때문에 금융기관에 압류가 된 상태였다. 재산적으로 보면 거의 제로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의식불명에서 20여 일만에 깨어난 직후 던진 단 한마디 “형은 잘 있느냐”는 짧은 질문은 나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들었다.
무의식에서도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아버님의 재산을 탕진한 자식을 원망하고 한탄할 수 있는데 아버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무조건의 사랑이었다. 모든 자식을 똑 같이 사랑하는 온전한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과 항상 밝게 펴있는 온유한 모습, 성실한 태도는 저 하늘의 해처럼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자녀들과 그 후세들에게도 영속할 보이지 않는 상속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