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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Sep 10. 2020

마음 정원 가꾸기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지어 여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속의 로망을 가지고 있다. 넓은 마당에 푸른 잔디를 깔고 집 여기저기에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을 심어 예쁜 정원을 가꾸며 멋있는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제 전원생활을 하다 보면 그게 말같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잡초들이 금방 무성해져 잔디밭은 잡초 밭으로 변해버린다. 꽃이나 나무들도 계속해서 잡초 제거나 가지치기를 해 주지 않으면 뒤죽박죽 볼품없는 모양이 된다.


급기야는 푸른 잔디밭의 마당을 갈아엎고 시멘트로 뒤덮는 경우도 생긴다. 전원에 와서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며 멋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의 마음도 전원주택의 정원과 같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평생 동안 잘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나의 아버님이 그러하셨다. 83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님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변함이 없으셨다. 항상 얼굴에는 웃음과 평화가 깃들었다. 마음 정원을 정말 아름답게 가꾸셨다. 


아버님은 군 복무 중에 허벅지 부분에 부상을 입었다. 뼈를 철심으로 잇고 결국 평생 동안 한쪽 다리를 절어야 하는 상이용사가 되었다. 제대 후에는 국가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 소사로 취직하였다. 글씨를 잘 쓰시고 성실해서 나중에는 학교행정 사무직으로 일하셨고 마지막에는 중학교로 발령이 나셨다. 62세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셨다. 그동안 4남 1녀의 자녀를 잘 부양했다.


학교에서 일할 때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같이 근무했던 학교 선생님들이 그런 아버님을 참 존대했다. 아버님을 무시하지 않고 마치 선생님인 것처럼 대우를 했다. 항상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깨끗하게 빗고 단정한 모습으로 근무를 했다. 


아버님의 퇴직금을 낭비해 버리고 재산상 큰 피해를 준 자녀가 있었어도 아버님은 변함이 없으셨다. 5남매 자녀에 대해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으셨다. 속으로 분을 쌓아 놓지도 않으셨다. 모든 자녀들을 똑 같이 변함없이 대하셨다.


아버님은 퇴직 후에 고향집으로 돌아오셔서 생활을 하셨다. 몇 호 되지 않은 작은 동네에 어울릴만한 분들이 거의 없었다. 마을 남자 대부분이 아버님보다 나이가 많아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외로울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동네에서 거의 외톨이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거기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집 주변에서만 맴돌 듯이 생활하면서도 즐거운 모습은 항상 마찬가지였다. 


아버님과 통화라도 할 때면 나와 아내에게 “고생이 많구나. 건강이 최고다. 걱정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며 항상 격려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에 자동차를 처분해 버려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 불편했다. 아내, 두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갈 때면 아버님은 집에서 1시간 떨어진 기차역까지 손수 차를 운전해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자동차는 다리가 불편한 아버님의 운전이 가능하도록 특별하게 개조된 것이었다. 


82세 때 집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셔서 다리 안쪽에 출혈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10일 정도를 그냥 지내시다 피가 온몸에 퍼져 생명이 위독하였다.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여 심폐소생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20여 일을 무의식 상태로 지내셨다.


그런 무의식 상태에서 처음 깨어나서 문병 온 자녀, 며느리와 손녀들을 보았을 때도 얼굴에는 평안함이 그대로 있었다. 삶을 비관하거나 한탄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단하여야 했다. 평생 동안 한쪽 다리를 절며 상이용사로 지내셨는데 다리를 절단까지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집에서 지내실 수가 없어서 요양원에 가셨다. 아버님은 그렇게 절단된 다리로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해야 했다. 아버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그때마다 아버님은 그런 힘든 상황에도 얼굴에 찡그림 하나가 없었다. 오히려 서울에서 내려오느라 수고했다며 자식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요양원에 계시다 6개월 정도 후에 천국으로 가셨다. 천국에 가신 아버님의 모습은 평안했다. 살아 계셨을 때의 평화로운 모습 그대로 천국으로 가셨다. 돌아가신 아버님 귀에 대고 “아버님 사랑해요. 저희를 잘 키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일이 바쁜 나머지 세월 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 50 나이를 넘고 보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한참 젊은 시절을 만끽하며 삶을 즐기고 있을 그때 부모님이 바로 지금의 내 나이셨구나! 아버님이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그렇게 행복하고 평안한 모습이셨구나!


지금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니 아버님의 그 한결같은 평안한 모습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에 가까울 정도다.


아버님께서 마음의 정원 가꾸기를 귀잖아 하신 적은 없었을까? 푸른 잔디밭에 불평과 불만의 잡초가 자라나도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가족들에게 힘들다고 소리치며 고함치고 싶지는 않았을까?


내가 아는 아버님은 83세의 삶을 완주하실 때까지 마음의 정원 가꾸기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한 적이 결코 없으셨다. 항상 긍정과 희망의 푸른 잔디를 가꾸셨고 웃음과 평안의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셨다.


아버님이 살아가신 삶의 여정은 나에게도 똑 같이 주어질 것이다. 나도 아버님처럼 마음의 정원 가꾸기에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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