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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Sep 27. 2020

삶의 불순물(dross)

요즈음 강아지 버니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뒷산에 자주 올라간다. 산은 약 300미터 정도의 높이인데 경사가 꽤 가파르다. 땀이 날듯하며 정상 부근에 도착할 즈음이면 노을이 빨갛게 서쪽 하늘을 물들인다. 


아내는 석양의 노을 진 하늘을 참 좋아한다. 아무리 물감으로 그리려고 해도 하늘과 흰 구름에 칠해 놓은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에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


노을 감상이 끝나고 다시 하산하던 중에 산길 한쪽 모퉁이에 하얀 꽃들이 조그만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백의 하얀색 꽃이었다. 들국화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색 기운이 매우 강렬했다. 


소나무, 떡갈나무, 참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숲 속에서 그 순백의 들꽃들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자태를 곱게 간직하고 있었다. 


내 삶도 산에서 만난 그 백색 들꽃처럼 불순물 없는 순백의 본체를 간직하고 있을까? 시커먼 쇳덩어리가 용광로에 던져져 제련과정을 거치며 온갖 잡다한 불순물들을 떨쳐내고 순금으로 탄생하듯 나에게도 찌꺼기가 제거된 삶의 본질이 온전히 남아 있는 걸까?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나만의 정체성이 살아 움직여 왔다. 특히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 그런 순수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시절 친구들의 얼굴은 미래의 돈, 권력, 명예와 같은 삶의 부산물들로 칠해지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부산물은 아님이 분명한 어떤 삶의 본질이 청춘기의 우리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 본질을 간단히 ‘순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진출하여 직장인이 되며 그런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참 어려웠다. 대학시절 뭔가 되겠다는 야망과 포부의 한편에는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어 보겠다는 이기적인 자기애가 자리 잡기도 했다. 


이렇게 20~30대의 청년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있어 왔던 순수함의 본질을 지킨다고 해서 과연 무슨 이득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순수함으로 세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 나의 미래가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앞날을 생각하면 염려와 걱정이 앞섰다. 자신감이 멀어져 가기도 했다.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내면에서 나 스스로 결단하고 자신을 격려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 스스로 지키고 간직한 나 자신만의 꽃을 내가 피워야 한다. 미래의 내 꽃의 모습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후회함이란 없을 것 같다는 점만은 확신이 들었다.


40~50대의 장년기를 거치며 나 자신을 돌아볼 틈이 별로 없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세월이 훌쩍 지났다. 20~30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과 번민이 많았지만, 장년기에는 번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미 결정된 나의 가치관에 따라 일사천리로 세월이 흘렀다.


5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니 20~30대 청년기의 시절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미래를 걱정하며 번민하며 세웠던 가치관이나 순수함, 자신만의 본질이 40~50대 장년기에 흔들림 없이 발현되고 실현되어 가기 때문이다.


20세를 기점으로 이후 30년 이상 이런 마음의 자세로 살아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의 순수함이나 가치관을 흔들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무서운 공격체가 무엇인지 손꼽으라고 하면 역시 돈의 유혹인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필요선이면서 필요악이다. 돈이 없으면 사회생활 자체가 어렵다. 돈이 많으면 생활이 참 편리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돈의 힘이 이러한데 어떻게 얼마만큼 돈을 벌어야 할까? 온갖 삶의 초점이 돈 하나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돈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에만 초점을 두다가 소중한 삶의 가치, 순수함이 사라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마음속에서 수시로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적어도 불법은 하지 말자,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말자는 기초적인 틀은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60대를 넘어 노년의 시기로 걸어 갈수록 삶의 불순물들은 나에게서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갈 수밖에 없다. 재산, 권력, 명예, 경쟁심과 같은 외피적인 불순물들을 나 자신의 내면, 가치관, 본질로 대체할 수 없다. 표면적인 부산물을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종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렇다.


용기를 내어 앞을 향해 걸어가 보자. 60대를 향해 가는 지금은 젊은 날처럼 심각한 고민은 별로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이미 젊은 시절의 경험을 통해 불순물과 순수의 차이를 뚜렷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용기만이 관건이다.


앞으로 걸어갈 인생에서 삶의 찌꺼기들이 얼마나 나에게 달라붙어 있을까? 인생의 화로 속에서 삶의 부산물들을 떨쳐내고 순백의 꽃이 되어 순수의 향기를 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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