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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Dec 26. 2020

영어야, 고마워!

친구의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반한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나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아내 말로는 나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영원한 타인이 될 뻔한 관계가 반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영어 때문이었다. 


이즈음에 아내는 영어와 씨름 중이었다. 아내가 직장에서 맡은 일이 영어로 된 외국 잡지를 번역하고 외국인들을 국내로 초청하여 이벤트 행사를 여는 것이었다. 영어가 필수였다. 


하지만 아내는 영어를 너무 못했다. 그래도 아내가 영어를 사용하는 회사에 취직한 한 것은 아내의 배짱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거침없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내는 영어를 잘하는 선후배에게 부탁해서 해결하곤 했다. 이제 1개월 후에 외국인 초청 국제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아내는 나에게 긴급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로의 만남이 계속이 될지 모르는 어정쩡한 관계가 영어를 매개로 끈이 이어지게 되었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회사를 퇴근하고 나면 거의 매일 저녁 명동의 사보이 호텔에 갔다. 서로가 좋아하는 콤비네이션 피자를 시켜 놓고 조용한 호텔 레스토랑 한쪽 구석에 앉았다. 산더미 같은 영어 서류를 붙잡고 영어 번역에 몰두했다. 


나에게 일을 맡겨 놓은 아내는 옆에서 쿨쿨 단잠을 잤다. 힘든 줄도 몰랐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아내와 함께 있다는 것이 그냥 기뻤다. 


번역하다 보면 호텔 레스토랑의 영업시간이 끝나는 늦은 밤이 되었다. 아내를 서대문에 있는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낙성대에 있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거의 막차였다. 


아내는 외국인 대회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낮에도 회사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해가 안 되는 영어문장을 물었다. 몇 번은 사무실 내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아내와 통화를 하며 설명을 해 주었다.


횟수가 잦아지자 내 주위의 앞뒤에 있는 직장 상사와 동료의 눈치가 보였다. 이제 전화가 오면 얼른 끊은 후 지하 아케이드에 있는 공중전화기로 부리나케 내려갔다. 그곳에서 편한 마음으로 길게 대화를 하였다.


낮에는 사무실과 지하 아케이드를 오르내리락 거리고, 퇴근 후에는 늦은 밤까지 번역 업무에 매달렸다.


아름답게 깊어가는 9월 말 가을에 시작된 아내와의 만남은 그렇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몸에 무리가 갔는지 여드름 비슷한 뾰루지 같은 것이 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얼굴 전체로 번졌다. 회사에서는 내 얼굴을 보고 놀려 대었다.


첫 만남에서 나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던 아내가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때 나의 변함없는 성실한 태도와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따뜻한 봄날인 5월에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 무대를 걸어가던 내 얼굴에는 아직 채 낫지 않은 연애시절의 뾰루지 흔적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어는 결혼 이후에도 나와 아내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었다. 


부암동 인왕산 높은 산자락에 전셋집을 마련하여 신혼을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아내는 나의 엉터리 영어 발음 교정에 나섰다. 영어를 잘 몰랐지만 발음만 교정하면 영어 리스닝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내의 지론이었다.


아내가 연습시킨 첫 단어가 “Lord”였다. “L” 발음을 위해 혀를 앞니에서 시작하여 “d” 발음을 위해 다시 입천장에 혀끝을 튕기는 훈련이었다. 


발음이 세밀하게 맞을 때까지 아내는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다. 잘 되지 않았다. “L”발음 하나도 제대로 못했는데 나머지 알파벳은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발음 교정은 스스로 포기했다. 대신에 혼자서 휴대용 워크맨 카세트를 이용해 영어회화 테이프를 이어폰으로 귀에 대고 계속 청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처형이 사는 지역인 군포시 금정역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을지로 사무실까지 편도 1시간 정도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영어회화 테이프를 계속 들었다. 아마 수백 개의 테이프를 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여전히 나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발음보다 리스닝을 우선하는 내 방법이 틀리다며 영어성경 테이프를 틀어 놓고 입으로 직접 원어민 성우를 따라 읽었다. 아내는 세밀하게 발음을 원어민과 일치시키는 쪽으로 노력을 했다.


그 후 영화관에서 외화를 본 적이 있었다. 미국인의 대화를 잘 알아들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거의 다 알아들었다고 했다. 나는 거짓말한다며 아내를 믿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가며 아내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부부동반으로 외국인과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럭저럭 내가 원하는 말은 만들어 할 수 있었는데 외국인이 하는 말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외국인과 동문서답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대화중에 아내가 화장실이라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겁이 덜컥 났다. 외국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내 쪽에서 계속 말을 걸어야 했다.


알 수 없는 병으로 큰 고생을 겪은 아내는 큰 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양재동에 있는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는 미국 대학원처럼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었다. 


아내는 그 기간 동안에도 입으로 중얼거리며 영어 원서를 공부하였다. 책이라면 눈으로 넘기며 이해하는 것에 익숙한 내가 보기에 아내의 공부법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라 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냐”라고 아내를 놀려 주었다. 


어느 날 아내가 대학원 숙제를 하느라 작성한 영작문을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아내의 영어 문장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문법식 문장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수학은 뒷전에 둔 채 성문종합영어를 4회 독파하고, 영어왕도, 천이백제와 같은 두꺼운 문법책까지 완독 하며 채득 한 내 문장은 딱딱한 기계적인 문법식 표현이 많았다. 


그런데 계속 입으로 중얼거린 아내의 영어문장은 어느새 원어민이 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법으로 이루어져 있어 훨씬 자연스러웠다.


아내의 끈기와 집념에 놀랐다. 내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더 이상 변명이 필요 없었다.


아내의 방법을 따랐다. 아내가 해 준 영어 발음 교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발음 교정은 매우 힘들었다. 차라리 육체노동이 편했다. 교정하는 아내는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영어성경을 낭독하는 원어민 성우의 발음에 맞추어 매일 입으로 따라 읽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40분 정도 원어민 영어성경 어플을 핸드폰으로 틀어 놓고 입으로 통독한다. 아내가 조언해 준 방법을 따라 꾸준히 지금까지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외국인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다. 변호사 업무를 하며 국제 계약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외국인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하거나 통역을 하기도 했다.  


내년이면 아내를 만난 지 30년이 된다. 우리에게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었다. 아내와 나를 더욱 가깝게 이어준 마음의 언어였다.  


“영어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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