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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Feb 12. 2021

머리를 맡길 수 있는 관계는 아름답다

설날 연휴가 시작되었다. 어릴 적 설날이 가까워지면 나를 포함하여 까까머리 동네 어린이들이 모두 함께 이발을 했다. 그렇지만 제멋대로 자라난 머리를 쓱쓱 가위로 멋지게 자를 만큼 생활의 여유가 있던 시절은 아니었다.


동네 친구들 모두 머리 모양이 비슷했다. 그냥 울쑥불쑥 자란 논두렁 잡초 같은 2부 머리, 3부 머리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살고 있는 아저씨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얼굴에 검은 구레 나루가 있던 분이었다. 6. 25 전쟁 때 우리 마을이 낮에는 국군 치하, 저녁에는 공산군 치하로 번갈아 바뀌며 치열하게 싸울 때 적군에 부역했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알게 모르게 그분을 따돌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린 나도 아저씨의 그 검은 구레 나루 때문에 어딘가 무서운 느낌이 들면서 가깝게 접근하길 꺼려했다.


아주머니는 마음씨가 매우 착했다. 재배하는 밭에서 맛있는 채소라도 나오면 가끔 한 움큼 따서 내 집 토방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놓고 가는 분이셨다. 그 부부는 내 누나와 동갑인 외아들을 두었다.


아저씨는 집에 머리 깎는 기계(바리깡)를 가지고 있었다. 설날이 다가오면 동네 어린이들이 모두 그 집 흙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혼자서 온 아이도 있고, 부모님 손잡고 함께 온 아이도 있었다. 모처럼 아저씨 집 마당은 설날을 맞이하는 동네 사람들의 들뜬 마음들로 가득 찼다.    


마당 한가운데에 직각으로 앉을 수 있는 자그만 나무 의자 하나를 세워 놓았다. 마당에 모여든 동네 어린이들이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먼저 아저씨가 몸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아이들의 어깨 둘레를 천으로 감쌌다.


물론 복잡한 가위질은 없었다. 머리 길이를 조금 길게 하려면 3부 틀을 기계에 끼워 머리를 뒤에서부터 앞으로 쭉 밀었고, 더 작게 하고 싶으면 2부 틀을 이용하여 깎았다. 한 명 자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쑥쑥 밀어낸 아이들의 머리 모양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2부냐 3부냐의 차이만 있었다. 깨끗하게 단장된 머리를 보고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무료로 이발해 준 아저씨에게 아이들이나 부모들 모두 고마움을 표시했고, 아저씨도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머리를 깎아 주던 아저씨의 따뜻한 사랑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이렇듯 어릴 적 이발은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를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맞이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대동 잔치였다.


그 아저씨처럼 나 자신이 바리깡을 들던 때도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였다.


당연히 군 복무 중에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 못했다. 거의 2부, 3부 머리였다. 한참 군기가 잡혀 있는 신참은 2부, 좀 여유가 생기는 고참은 3부 머리였다.  


서울 용산에 있는 한미연합사에서 복무하였는데 엄격한 내무반 생활을 하였다. 평일 외출은 금지되었고, 2~3개월에 한 번 정도 1일간 외박을 할 수 있었다. 토요일에 나가서 일요일에 다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박을 나가기 위해서는 상사인 인사계장 앞에 정복을 입고 신고식을 해야 한다. 신고식을 받는 인사계장은 장병의 머리를 살펴보고 좀 길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외박을 취소해 버린다. 외박이 취소된 장병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박 신고식이 있기 하루 전인 금요일 저녁에 내무반은 갑작스러운 이발 행사가 벌어진다. 토요일에 외박 나갈 예정인 고참들이 손 솜씨가 좋은 졸병들을 선점해서 이발을 시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손 솜씨라곤 하나도 없던 나에게까지도 고참으로부터 간절한 도움의 요청이 들어왔다. 하는 수 없이 소중한 저녁 잠자는 시간에 내무반 아래에 있는 공동 목욕실에 들어가서 바리깡을 들고 고참의 머리를 깎았다.


모처럼의 외박을 나가 데이트하거나 사회친구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고참들은 바리깡 말고도 가위질을 해 주길 원했다. 배운 적도 없어 그냥 손 가는 대로 가위질을 열심히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멋있게 자른 모습이 되진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좀 꼼꼼하게 최선을 다해 이발을 해 주었다.


어느 날 고참 한분이 나더러 이발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발을 잘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발병을 구하지 못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입대한 점잖은 고참이었다. 거절할 수 없어 저녁 취침 시간에 일어나 공중목욕탕으로 가 이발을 시작했다. 바리깡 단계가 끝나고 한참 열심히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가위질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귀 옆 부분이다. 귀가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한참 귀 부분을 가위질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악”하고 소리를 쳤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그가 한 손으로 귀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손에 피가 배어 나왔다. 가위질하다가 그의 귀를 자른 것이다. 크게 자른 것은 아니지만 피가 나올 정도가 되어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다행히 고참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고의가 아니고 그를 도와주려다 실수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취침시간에 일어나 고참의 머리를 깎는 고된 사역으로부터 말끔히 해방되었다.


군을 제대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한동안 이발소에 다녔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미용실로 가게 되었다. 아내와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초기에 아내가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던 또래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어린 아들과 남편의 머리를 직접 자른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내가 어느 날 내 머리를 직접 자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손 솜씨가 좋았는데 뭔가 손놀림에는 자신이 있어했다. 이발도 기계와 가위만 있으면 별개 대수냐면서 내 머리를 자르고 싶어 했다.


미용실에서 나름 원하는 취향대로 잘라 온 터라 약간 멈칫했으나 아내의 손에 내 머리의 처분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점잖은 금융기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잘못 자르면 동료들로부터 망신이 될 것이었다. 정말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과감히 아내에게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다 자르고 난 내 머리는 무척 짧았다. 반듯하게 잘랐지만 가지런히 깎아 놓은 잔디밭 같은 모양이었다. 그 머리로 사무실에 출근하니 사람들이 내 머리를 보고 “다시 군대 갔느냐”라고 놀려댔다.


그렇게 몇 번 직접 아내가 이발해 주다 어느새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다가 IMF를 만나 회사가 부도나고 직장을 퇴직하게 되었다. 신림동으로 이사를 가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과 아내의 영어 과외비로는 두 딸이 있는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벅찼다. 한쪽에 팽개쳐 두었던 예전의 바리깡과 가위를 아내가 다시 꺼내 들었다.


이제는 순전히 미용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아내가 손수 내 머리를 자르기로 한 것이다. 내 머리뿐만 아니라 두 딸의 머리도, 아내의 머리도 직접 아내가 해결했다.


이번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남의 눈치도 필요 없었다. 다닐 직장도 없고 만날 친구도 없었다. 오직 독서실에서 사법시험만 준비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아내가 내 머리를 가지고 멋있게 하든, 실수를 하든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드디어 아내는 가위질을 멈추었고 다시 미용실로 가서 이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 모양이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이 미용실 저 미용실 옮겨 봐도 내 머리 두상에 딱하니 들어맞지 않은 것 같았다. 아내도 미용실 머리를 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다시 아내가 가위를 들었다. 내 머리의 두상과 나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역시 아내였다.


지금은 아내가 잘라 준 머리 모양에 완전히 만족한다. 미용실을 경영하는 분들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제는 아내가 아니면 안 되는 정도가 되었다. 아내가 바쁘면 머리가 보기 싫게 길어져도 꾹 참고 아내가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린다.


머리는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머리를 맡길 수 있는 관계는 깊은 신뢰관계가 아니면 안 된다.


89세인 장인은 서울 녹번동에 살다가 경기도 양수리로 이사 간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녹번동에 살 때에 다니던 이발소를 이용한다. 최근 신문에 우리나라 재벌 기업 회장들도 자신만이 단골로 이용하는 이발사에게 가서 머리를 자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 머리를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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